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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명 Dec 03. 2019

레쓰비

- 송화진(1978~2018)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음악' 이성복 


밤중이었는데 화진이한테 다급한 전화가 왔다. 집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오려고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안된다고 소리쳤는데도 막무가내라고. 평소 시원시원하던 화진이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나도 화진이도 아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제일 가까운 가게에 가서 레쓰비 캔커피를 두 개 샀다. 비밀봉지를 두 개 얻어서 이중으로 담아 싸매고 휘두르기 쉽게 손목에 묶었다. 진정이 될 수 없는 상황이면 그걸로 정신이 들 때까지 패줄 생각이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최악이 아니라면 화진이한테 커피라도 권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고. 

내달려 가봤더니 그 남자는 가고 없었다. 화진이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사람도 나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 누가 모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다급한 전화를 받고도 캔커피를 사들고 터덜터덜 걸어온 나를 보고 화진이가 몹시 어이없어 했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 위험한 순간에 한가롭게 가게에 들러 커피나 사왔다고 타박 비슷한 불평을 들었다. 나도 그냥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연락한지 15년은 훌쩍 넘었다. 작년에 화진이는 강릉인지 속초, 동해 어디쯤 해안도로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왜 화진이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갔는지, 오토바이는 언제 샀는지, 샀다면 어떤 걸 몰았는지, 언덕에서 오토바이는 잘 나갔는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부당한 일처럼 느껴진다. 겨우 생사 밖에 전해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놓인 엉뚱한 사람만 같다는 생각. 


그렇다고 내가 화진이를 그렇게 극진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면 대답을 잘 못하겠다. 다만 잠깐동안이지만 화진이가 알던 나를 소환했던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불안정하고 뾰족하고 투박하고, 약하고 날이 서 있어서 곧장 화를 내는 일도 많았던. 그때는 세상이 좀 더 알기 쉽고 명쾌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하지 않은 것까지 사과할 일도 없었고, 화를 쏟아 내려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내 마음은 잘 단련돼 있어서 자동문처럼 매끄럽게 열렸다가 닫힌다. 마음이 들끓었다가 곧장 식는다.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나는 내가 별로 애도할 만한, 그에 값하는 기억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화진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한테도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핑계를 만들어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한참 시간을 때우다가 잠깐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지금 화진이를 만나면 나는 분명 불편해할 것이다. 온갖 욕망에 시달리며 마음 속 흙탕물을 가라앉히느라 바쁜 나에게, 화진이 같은 존재는 나를 추궁하는 것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왜 내가 뭐 왜 내가 어때서. 그런 말이 튀어나갈 것만 같다. 하찮은 일로 날선 농담이나 지껄일 것 같은데 막상 추모집에 실린 사진을 보니 마음이 미어진다. 마음이 미어지네.


화진이가 괜찮다고 하는 말에 손쉽게 물러서서 돌아왔다. 남의 집에 엎드려서 잘 잤다. 조금 더 곁에 있을 걸 그랬다. 나는 그 머쓱한 시간이 나와 화진이가 한 공간에 머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겨우 레쓰비나 마시라고 권하고 냉큼 돌아온 게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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