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명 Jan 31. 2020

나 안볼거야? 이게 웃겨?

- 472번 데자뷰

퇴근길이었는데 남녀가 말 다툼을 하고 있었다. 주의가 산만한 편이라 그런가, 나는 길 가다가도 남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잘 훔쳐 듣는 재능이 있다. 막상 회의 테이블 건너편에서 건네는 말은 맨날 까먹지만. 472번 버스에서 내려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는 척 흥미진진한 그들의 다툼을 마음 속으로 녹취하기 시작했다. 


"나 안볼거야?", "이게 웃겨?!"


저런저런. 남자분이 아마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탔던 듯 하다. 여자친구는 하도 연락이 안되니 사무실 앞에서 딱 퇴근 시간에 맞춰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여자친구는 그가 일 때문이 아니라, 이런저런 친구들과 또 거하게 음주가무를 즐기느라 자신을 내내 무시했다고 생각한다는 것. 게다가 '맨날 똑같은 핑계'를 대는 남친의 행동에 '신물이 난다'는 것이다. 또 그러면 '사무실로 쳐들어가겠다'고 '전에도 이미 경고'까지 했는데 '웃음이 나오냐'고 따졌다. 귀를 쫑긋 세워 한참을 듣고 있는데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어서 나는 결론까지는 못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처음 본 수운간 운명이라고만 딱 느꼈어. 한 펴언의 여엉화 주인공 같던 난 이-젠없어." 엄정화가 노래하고 있었다. 저 커플도 처음 본 순간 운명이라고 느꼈겠지? 이 노래 '엔딩 크레딧'을 천 번쯤 들은 것 같다. 천 번쯤 듣는 동안 주위 사람들도 본의 아니게 백 번은 들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계획이 없긴 한데, 혹시라도 내가 죽게 되면 이 음악을 한 동안 틀어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퇴근길에 꼭꼭 듣는 음악이라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다음 날도 변함없이 또 엄정화를 들으면서 472번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어라? 어제 그 남녀가 또 같은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흥미진진했다. 여자분은 복장이 바뀌어 있었지만, 남자분은 오늘도 양복 자켓 위에 무슨 독수리 패턴을 수놓은 이상하고 커다란 점퍼를 덧입고 있었기에 손쉽게 기억해냈다.  


'정수씨가 그러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계속 일찍 퇴근했다'고 그랬단다. 어제 그 일로 또 싸우는 것 같다. '연락이 안된다'고 했더니 '정수씨가 그렇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찍 퇴근해서 친구들이랑 술을 퍼마신 것이 '틀림없는데 왜 계속 거짓말을 하냐'고 추궁한다. 아마 정수씨라는 사람은 남자분의 직장 동료인 것 같다. 여기까지 듣고 있으니 여자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요하다. 어제도 남친의 사무실 앞으로 찾아와 그렇게 한참을 따졌는데, 오늘 또 같은 이야기로 상대방을 끝까지 몰아부치는 걸 보고 있으니 감탄이 나온다. 


오늘도 횡단보도 신호에 맞춰 움직이느라 이 남녀의 이야기는 끝까지 듣지 못했지만 왠지 저렇게 집요하고 숨막히는 것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별로 쿨하지도 뜨겁지도 못한, 한없이 미지근한 사람이라서 더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튼 싸우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계속 싸우는 일만큼은 피해야겠다는 오늘의 미지근한 교훈.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 김중식 시 '모과'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레쓰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