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활동을 시작한 이래 나는 언제나 고용된 상태로 육체적인 일이나 정신적인 일을 하여 소득을 얻는 근로소득자였다. 사업소득이나 자본소득을 경험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감당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의 일들을 선택해왔고, 대기업이나 높은 연봉, 지위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안분지족의 자세여서 일까. 광탈을 겪어 본 적이 없다. 사실 광탈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
나의 첫 4대보험 직장은 스타벅스였다. 2009년 휴학을 하며 세계여행과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전 세계 누구나 알만한 기업의 이력이 필요했다. 스타벅스 경력은나의 레쥬메를 채우고여행을 떠나기 위한 종잣돈 마련을 위해 꼭 필요했다. 운이 좋게도 집과 가까운 곳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스타벅스 한줄은 캐나다에서는 물론 제주의 작은 카페와 재입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누구나 첫 사회생활의 고난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를 시작할 때 나는 일정기간 자주 눈물을 훔쳤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주를 이뤘지만,근로소득자의 세계는 매섭고 차가웠다. 처음 배우는 생소한 용어들, 빠릿빠릿하지 못한 육체와 서비스는 없는 정신상태, 주눅 든 희미한 목소리 등 나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새롭게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뭐든 배우고 익히면 는다고 했다. 바리스타 1년이되자 슈퍼바이저의 업무를 했고, 오픈과 마감을 주로 맡았다. 비상한 잔머리로 동선을 최소화해서빠른 세팅과 청소가 꼼꼼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밀린 주문을 파트너들과 함께 처리하고 한숨을 돌릴 땐 노동에서 보람과 성취가 느껴졌었다. 1년 반이 지나자 함께하는 파트너들과의 추억도 많아졌고 커피에 대한 지식도 늘었다.
제일 좋았던 것은 파트너라는 개념이었다. 스타벅스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모든 곳이 직영점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 미국 본사와 신세계 반반의 지분으로 운영됐다. 파트너라는 개념도 미국에서 물 건너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스타벅스를 만들었다면 수직적인 관계였을 근로자 사이에서 파트너라는 개념은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 냈다.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며 작은 일도 같이 하는 동등한 관계로 연차에 따른 기회가 열려있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선택하는 직책에 따라 책임과 업무량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생소했지만 스타벅스라는 기업에 대해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스타벅스는 나이나 성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영화 '아이엠 샘'에서 샘은 장애인이고, 스타벅스에서 일한다. 그만큼 모두에게 열려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물론 현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른 현장을 내가 경험할 줄은 몰랐다.
어느덧 한국 나이 34세, 이제 세상의 흐름에 맞춰 일용직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재입사의 기회를 사용해서스타벅스에서 좋았던 경험을 되살리고 바리스타로만 일하면서 짧은 시간을 노동에 쓰고 4대 보험 적용의 혜택과 작지만 안정적인 고정수입을 갖고자 했다. 당시 종달리에 살았기 때문에 제일 가까운 성산일출봉에 있는 스타벅스에 지원했다. 2층 창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의 멋진 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재입사라는 점이 장점이 되었는지 바로 채용이 됐다. 다시 청소부터 시작했고, 달라진 규정들을 익히고 잊힌 기억을 되살리고 새로 배우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히 세 달 후에 나는 그만두게 된다. 나는 대충 짐작과 눈치로 점장과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았다. 나를 가르치는 슈퍼바이저나 부점장의 나이는 모두 20대여서 그들은 나의 나이를 불편해했다. 항상 배운다는 자세로 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내가 재입사인 상태(어디까지 알고 모르는지에 대해)를 가르치기가 어렵고 나이도 많아서 불편하며파트너와 친해지려고 하지 않는 다는 이유까지 세우며 문제삼았다. 그 당시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나의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지만 그들의 선입견을 바꾸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좋았던 기억으로만 남겨뒀어야 했는데, 재입사는속 쓰림과 두통을 동반했다. 나는노동 제공이 아닌 그 기업의 가치를 사는 주주를 택하기로 했다.
스타벅스 퇴사 후 바로 사무직에 문을 두드렸다. 제일 먼저 연락이 온 곳은 항만 시설 시공 현장에 있는 감리사무실의 경리였는데, 두 달째 채용이 되지 않고 있었다. 감리회사에서 건축협회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사람(전공자)을 적은 월급의 경리 채용 조건에 걸었기 때문이다. 마침 나는 건축학을 전공했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었다. 전공과 무관한 업무에 관한 회사의 이해관계는 제쳐두고,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처음 건네신 말은 운영비 관리와 서류 작성의 간단한 업무인데 할 일이 많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업무 외의 시간은 영화를 보든지 책을 읽던지 관여하지 않으니 자유롭게 사용하라는 얘기였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일자리가 있다니, 할렐루야:) 인상 좋으신 미래 나의 상사는 그 자리에서 내가 마음에 든다며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막 스타벅스를 박차고 나온 상태라 정신적 회복이 덜되었고, 퇴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1주일 정도 스케줄이 잡힌 상태여서 거절하고 1주일 뒤에 출근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렇다면 근로 계약서는 오늘부터로 쓰고 일주일 뒤에 출근하란다. 일주일의 임금을 그냥 주시겠다는 것이 아닌가. 인생 첫 신이 계신 직장이었다.
감리사는 시공사에 비해 업무가 무척 적었다. 그런 곳에서 경리는 간단한 총무의 일, 문서작성, 서류 정리 그리고 적절한 맞춤형 인간관계를 유지하면 만사형통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 학원을 다녀서 몇 가지 컴퓨터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문서작성을 곧잘 해냈다. 평소 하던 습관대로 내 돈처럼 아껴서 항상 적자였던 작은 운영비를 흑자로 전환했다. 옆에 바로 시공사 사무실도 있었는데 회식장소를 내가 정할 만큼 관계도 좋았다. 그런 나를 항상 좋게 봐주시고 칭찬해 주시는 두 분의 상사 밑에서 나는 또 한 번 워라밸을 이뤄낸다. 가끔 서핑 시간으로 늦은 출근을 하고, 상사의 장거리 출퇴근으로 덩달아 빠른 퇴근을 했다. 전날 과음으로 회사에서 잠도 잘 잤고, 점심식사 후 성산일출봉이나 카페 마실을 핑계로 눈치껏 자리를 자주 비웠다. 한 달 총량 4시간의 업무 이외의 시간은 영화를 보고 책도 읽는 자유의 시간을 누렸다. 4대 보험이 적용됐고 월급은 최저시급을 웃도는 금액이지만 나에겐 생계를 유지하고 자본을 만들어내기 충분한 금액이었다. 현장 기간 2년 정도로 기간도 길지 않아서 적당하고 퇴사 후 자연스럽게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다. 더 바랄 게 없었다. 행복한 월급루팡이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