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에 대하여

<은중과 상연>을 보았다.

by 포카치아바타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았다.

나에게 드라마는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인물들의 감정선에 자연스레 이입하게 된다는 점.

둘째, 어떤 상황 속에서 가슴에 콕 박히는 ‘말’ 때문이다.

어떤 말은 오래도록 아리게 남아 가슴을 저미고,

또 어떤 말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말에는 큰 힘이 있다.

그 힘은 단어의 의미에만 있지 않다.

말 속에는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의 온도와 태도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은중과 상연〉을 보며 유독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은중의 눈으로 보면 상연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결핍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반대로 상연의 눈에 비친 은중은 다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자본주의의 잣대로 본다면,

상연은 승승장구할 것 같았고

은중은 개천에서 용이 되지 않는 한 평범하게 살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드라마는 달랐다.

상연은 수많은 좌절 끝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은중은 누구나 꿈꾸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평범하지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때로는 은중이 되었다가,

또 다른 장면에서는 상연이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내가 상연이 되었을 때, 내 마음에 깊게 남은 단어 하나가 있었다.

바로 "결핍"이다.


결핍(缺乏)

: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람.


특히 어린 시절에 생긴 결핍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깊게 베인 상처가 시간이 흘러도 흉터로 남듯, 지워지지 않는다.

아이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태어나 보니, 이미 세상 한가운데 서 있을 뿐이다.

선택과 책임의 몫은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결핍을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핍은 약점이 되어 누군가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나를 무너뜨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결핍을 마주하고 채워가는 일은 결국 내 몫이다.



나의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오랜 시간 이 글을 붙잡고 있었다.

글로 토해내면 후련해질 거라 생각했고,

그 후련함 속에서 결핍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길게 써 내려간 글을 지웠다.

글을 쓰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결핍을 결핍 그 자체로만 보기보다,

살면서 생긴 수많은 상처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결핍을 ‘해결’하려 애쓰기보다,

비워진 자리를 더 좋은 것들로 채워가기로 했다.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남편,

그리고 귀여움이 한도 초과인 우리 딸과 아들.


결핍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지금 내가 주고받는 사랑과, 매일 마주하는 작은 행복들이 이미 그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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