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시골에 계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한집에 살게 되었다.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온 가족이 아빠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쐬러 다니기도 하고,
아빠 퇴근 시간에 맞춰 집 앞에 돗자리를 펴고 놀며 기다리기도 했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큰 솥에 잼을 끓여 나누어 먹곤 했고,
계절이 바뀔 때면 내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시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따뜻하고 소박했던 우리 가족의 행복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집에 살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지길 바라며 자영업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어린 나와 동생이 걱정되고,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도 챙겨야 했기에
함께 사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 후유증으로 술만 드시면 난동을 부리시던 할아버지와 고집이 세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세월의 긴 이야기를 모두 풀어내자면 끝이 없겠지만,
결국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치매가 발병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집에 계시는 게 좋을 거라 믿으며
끝까지 함께 지내려 애썼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집에서 돌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아빠와 할머니는 늘 맞지 않았다.
‘부모자식 간에 맞고 안 맞고가 있겠느냐’ 묻는다면, 분명히 있다.
성격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삶의 가치관이 다르다면
아무리 천륜이라 해도 대화가 통하지 않고 마음에 금이 간다.
그럼에도 그 관계를 이어가는 힘은
누군가의 넉넉한 마음, 혹은 끝없는 인내에서 비롯된다.
내가 보기엔 아빠가 늘 참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미웠다.
나를 사랑해주시던 분이었지만, 미웠다.
같이 살며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지켜본 나로서는
할머니를 온전히 좋아하기가 참 어려웠다.
30년.
내가 열세 살이었으니, 꼬박 30년의 여정이 이제 막을 내렸다.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이유로, 고모들은 아무 때나 들락거렸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집’이었지만 ‘쉼’이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제야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 아빠 두 분의 공간이, 두 분이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의 안부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외출 중에도 할머니 괜찮으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할머니 때문에 서둘러 집에 돌아와야 할 일도 없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풀어내다 보니
마치 불편한 존재를 치워버린 듯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좋았던 날도 있었고, 미안했던 날도 있었으며,
고마웠던 날도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이 마음 — 애증이라 해야 할까.
사전을 찾아보니 ‘애증’은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래, 딱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애증.
손녀인 나도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데,
마음약한 아빠는 오죽할까.
그러나,
긴 세월이 흘러 이제 아빠도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셨다.
100세 인생이라지만,
60대의 몸은 이미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뎌낸 흔적투성이다.
여기저기 고장 난 곳이 늘어가고,
젊음과 청춘은 어느새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 버렸다.
먹고사는 문제에 쫓기며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들.
그 속에서 아빠의 인생은 늘 ‘누군가를 위해’였지,
정작 ‘자신을 위해’였던 적은 많지 않았다.
할머니의 돌봄의 형태가 집에서 요양원으로 옮겨진 것 뿐이니,
조금은 후련하게,
조금은 가볍게.
그동안 애써 눌러왔던 숨을 길게 내쉬며 스스로를 다독여주었음 좋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다 보면,
죄책감 대신 감사가, 미련 대신 따뜻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라고 책망하지 말고,
"애썼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잘했다"
스스로를 토닥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