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나비

에피소드8. 용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by 포카치아바타

에피소드8. 용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천하의 불효자가 된 나는, 오히려 겉잡을 수 없이 담담해졌고, 알 수 없는 힘으로 대담해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의 궤도 안에 머무는 소년이 아니었다.

운명처럼,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과 소녀의 졸업식이 같은 날이었다. 나는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소년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 대신, 나는 소녀가 있는 교정으로 향했다. 소녀는 나를 보자마자 놀라움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나는 그 걱정어린 눈빛에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진심을 다해 맘껏 축하해주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함께 맞는 마지막 공식적인 날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을까.

며칠 후, 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나와 누나가 살고 있던 자취방의 전세 계약을 서둘러 삭월세로 바꾸고, 당시 전세금 100만 원을 고스란히 손에 쥐었다. 지금 생각해도, 열아홉 스물의 경계에서 내가 어떤 용기로 그런 '사고'를 저질렀는지 스스로가 대단하고 대견하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독립 선언이자,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강렬한 약속이었다.

여기서 잠깐, 소녀의 이야기가 있었다.

소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큰오빠와 결혼한 새언니는 소녀에게 노골적으로 공장에 들어가 돈을 벌라고 압박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소녀는 등교 전 조카의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한집에 살면서 새언니가 주는 눈치와 냉대는 소녀를 숨 막히게 했다. 엄마에게도, 과묵한 큰오빠에게도 이 고통을 말할 수 없었다. 소녀는 점점 혼자만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외톨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소녀 역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막다른 길에 선 소년과 소녀의 마음이 더욱 깊이 닿았던 것이다.

밤 11시 37분, 송정역

길고 긴 망설임과 불안의 시간들이 끝났다.

송정역 플랫폼에 서서,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는 막막함 대신 서로에게서 오는 벅찬 자유를 느꼈다. 가진 것이라곤 소녀의 엄마가 담은 고추장까지 챙겨 넣은 가방 7개와, 전세금을 뺀 100만 원, 그리고 서로뿐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짐을 바리바리 짊어진 채, 용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가운 기차의 덜컹거림 속에서, 우리의 심장은 낯선 도시, 서울을 향한 떨림으로 가득 찼다. 그곳이 지옥이든 천국이든, 이젠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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