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나비

에피소드9. 우리의 첫 한솥밥

by 포카치아바타

에피소드9. 우리의 첫 한솥밥


용산행 완행열차는 우리를 새벽의 서울로 뱉어냈다.

서울역.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는 날카롭게 차가웠고, 낯선 대도시의 풍경은 경직된 긴장감을 주었다. 우리는 가방 일곱 개를 끌고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일단 몸을 뉘어야 했다. 눈에 보이는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비로소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자 그동안 억눌렸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우리는 짐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보듬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낮 12시였다. 여인숙 방 안은 한낮의 햇살로 환했다.

어제의 우리는 이제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이었다.

그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닌, 우리의 격렬한 배고픔이었다.

꼬르륵—

나지막이 울리는 소리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긴장했던 마음에 허기가 대신 들어찬 듯했다.

나는 서둘러 여인숙 밖 슈퍼로 달려갔다. 쌀과 오이를 한 움큼 사 들고 돌아왔다.

챙겨 온 작은 쿠커에 밥을 한솥 가득 지었다. 방 안에는 따뜻하고 구수한 밥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그때, 소녀가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고추장이었다. 소녀의 어머니가 직접 담근, 맛깔스러운 빛깔의 고추장.

"엄마 고추장 진짜 맛있어."

집을 떠나는 와중에 그 무거운 고추장 단지를 챙겨 나온 소녀의 엉뚱함이 어찌나 귀엽고 재미있던지,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우리는 뜨끈한 밥 위에 고추장을 푹 찍은 오이를 올려 먹었다. 그날, 살면서 그렇게 많이 밥을 먹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밥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한 안정감과, 모든 것을 함께 시작한다는 연대감이 우리를 채웠다.

고추장 하나로 든든해진 스무 살의 배짱이, 막막한 서울에서의 시작을 응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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