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동사무소에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러갔다가 황당한 얘길 들었다.
"혹시 외국인이세요?"
(응? 님 장난? 나 한쿡인 맞아요)
동사무소 직원말로는 내가 무연고자로 나온다는거였다.
벙쪄있는 내게 직원은 주민번호를 묻더니 잠시 후에 이렇게 설명했다. 호적과 주민번호상의 생일이 달라 무연고자로 나온거라고.
그 사정을 말하자면 부모님은 출생신고시 생년월일을 정확히 기재했으나 동사무소직원이 등록을 잘못해서 나는 내 생일보다 한 달 일찍 태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30년 넘게 살아왔다. 그런데 호적은 제대로 기재를 한 것. 때문에 나는 부모도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 되어버린거다.
그나마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니 망정이지
내가 해외에 여행을 갔다가 사고라도 생겼으면 그 사실이 내 가족에게 전해지지도 않았을 수도 있었단 끔찍한 얘기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법원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다.
나의 실수가 아닌 것으로 내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정정하기 위해서는 나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미 30년 넘게 한 달 빠른 주민번호로 학력이며 자격증이며 경력증명을 해왔는데 그걸 바로잡으려면 자격들을 내가 일일히 바꾸어야한단다.
그 많은 걸 개인이 바꾸는 게 가능이나 하겠나?
(이런 쌍쌍바...)
그 절차조차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물어 물어 전화를 했으나 계속해서 담당부서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다른 부서로 전화를 해보란 소리만 돌림노래처럼 들었다.
화가 나고 짜증스러웠고 시스템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나라에 까지 분노가 뻗쳤다.
그러나 나는 일개 평범한 사람일 뿐, 그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결국 10번이 넘는 통화를 거쳐 겨우 절차만 알아냈을 뿐 내가 받는 불이익과 수고에 대한 것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결국 난 재판을 했다. 원래 생일인 호적대로 주민번호를 바꾸는 게 아니라, 주민번호에 맞춰 호적을 바꾸는 걸로 말이다. 그것도 내가 30여년간 주민번호대로 가짜생일로 살아왔다는 걸 입증하는 서류까지 내면서.
찾아내서 니들이랑 싸울기야
싸움이요?누가 이길 것 같은데요?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딸의 산재신청을 위해
아버지가 대기업에 맞서 재판을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무재해라는 타이틀을 걸고 업무상 재해가 아닌 개인적 질병으로 치부하는 기업에 피해자 스스로가 질병의 연관성을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실화라는 것, 그리고 최근에서야 분쟁이 종결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긴 싸움이었을 지 얼마나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고통받았을 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어떤 기업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이미 영화제목에서부터 말하고 있으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어릴 적에 몰랐던 세상이 자꾸 다가온다는 것이다.
몰라도 좋았을 부조리, 사회병폐, 권력다툼, 사건사고, 병, 화려해보이는 이사회의 이면들.
세상은 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무섭고 잔인하게 변해가고 있다.
원래부터 세상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세상의 이면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는 때문에 세상이 더 무섭고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나 정도의 억울함은 억울함 축에도 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에 세상은 너무 관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봤다.
겨우 행정적 오류 하나를 정정하는데도 많은 수고와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이 세상에 수많은 억울한 일들과 사건 사고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법이란 것은 힘 없는 자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부와 권력을 쥐려하는지도 모르겠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국민청원게시판이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청원들이 올라온다. 대부분이 평범한, 평범하기에 억울하고 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실함이 모인 곳이다. 글을 읽다보면 분노하기도 절망스럽기도 하다.
앞길 창창했던 대학생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숨진 사건이 있었다. 국민청원이 계속되었고 음주운전 사고 처벌수위를 높이는 법안이 만들어졌다.
결국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외침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화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평범한 이들의 희생이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나 우리, 포기하지는 말자. 세상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