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줄 아는 지혜

by 밑줄긋는여자

한 번은 외출할 옷을 고르는 데 한참이나 고민을 했다. 붙박이장 가득 옷이 걸려있는데 정작 입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 중에는 20대 초반에나 입을 수 있었던, 다시는 입을 수 없을 듯한 타이트한 옷도 있다.

유행이 지나버린 통 넓은 청바지도 있고, 특가라 해서 입어보지도 않고 샀던 옷도 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입겠다고 상품택도 떼지 않은 옷은 앞으로도 입을 시기가 요원하다.

그런데도 내 옷장은 비워지는 일이 거의 없다.


버리는 것이 이토록 어려웠던가.


때로는 버려야 할 시기가 온다.

그게 일이든 사랑이든 물건이든 비워야 할 때가 있다.


방송작가교육원에 다닐 때 '여의도 귀신'이란 말이 있었다. 그 의미는 방송작가의 문에 들어서지 못한 수강생들이 포기를 하지 못하고 5년이고 10년이고 학원을 재수강하며 여의도를 떠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 역시 마지막 코스인 창작반 진학에 실패했다.

다시 전 단계의 수업을 들을까 참 많이도 고민했지만 다니지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영화'올레' 스틸컷


영화 '올레'는 대학동창생 셋이조문을 위해 제주도를 찾으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다. 명예퇴직당한 대기업 과장 중필과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아나운서 은동, 13년째 고시생 수탁이 등장하는데 고시생인 수탁은 사법고시 폐지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려고 유서까지 쓴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제주도 방문을 계기로 13년 동안 버리지 못했던 고시공부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한다. 중필 역시 끊지 못했던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털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된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내가 실패했다는(잘못된 선택을 했다는)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우리가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인생은 언제나 선택이기에

버리는 것과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의 결과 역시

스스로 선택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버리기 아까워

분명히 끝이 보이는 데도 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게 예의없는 행동이다.

더 나은 선택과 시작을 할 기회를 빼앗는 셈이니까.


십 년이 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가 말했다.

지금은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다만 십년이 지나는 동안 신입사원으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버렸고 경력하나 없는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아르바이트도 나이가 많아 부담스러워한다고.
그래서 대외적으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걸 놓아버릴 수도 없단다.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면 그 시간만큼

인생도 상처받기에

때로는 힘들어도 내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하는 것 같다.


안다.

인생이 실패한 것 같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어보고 싶다는 걸.

포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만 비울 수 있다.


비워야만 다시 채워진다.

포기해야 다시 시작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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