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루아르 고성지대
루아르강은 프랑스에서 가장 길다고 하는데 강 주위에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다. 예전부터 왕족이나 귀족들이 강 주변에 앞 다투어 성들을 짓는 바람에 지금도 수백개의 고성들이 남아있어서 루아르 고성지대라고 불리운다.
사실 루아르 강가에 있는 성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성이라고 하면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튼튼한 성벽과 망루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수원성이나 남한산성 같은 우리나라의 성들은 제쳐놓더라도 유럽에도 생말로나 두브로브니크, 카르카손 같은 성채도시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루아르의 성들은 별로 튼튼해 보이지도 않고, 커다란 창문도 너무 많아서 전투용이라기 보다는 그냥 큰 대저택에 가까운 느낌이다. 성도 예술적으로 만드는 프랑스 사람들의 성향 때문일까?
생말로에서 루아르 고성지대 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기 때문에 미리 숙소를 예약하기로 했다. 투르에 있는 캠핑장에서 묵기로 했는데 아직 몸이 완전치 않아서 샬레를 전화로 예약했다.
샬레는 캠핑장에서 지붕 있는 독립공간을 부르는 용어인데 나라마다 이런 시설을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프랑스나 스위스 쪽은 샬레, 노르웨이 등 북유럽은 히테라고 부른다. 그 밖에도 방갈로, 아파트먼트, 캐빈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고 시설도 다양한데, 비가 많이 오거나 너무 추워서 밖에서 자기 힘든 경우, 그리고 물가가 너무 비싸서 호텔에서 자기 힘든 경우에도 유용하다.
대여섯 시간쯤 걸려 캠핑장에 도착하니 이미 시간은 열 시 가까이 됐다. 리셉션 문은 닫혀 있는데 약속한 대로 리셉션 앞 화분 아래에 열쇠가 있어서 샬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처음 와본 캠핑장이고 샬레여서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보니 나름 시설이 괜찮다. 화장실이나 침구도 깔끔해서 어지간한 호텔보다 시설이 나은 거 같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정도면 아주 좋은 편에 속했고 여행 후반으로 갈수록 추위, 습기, 바람, 벌레 등등 다양한 유형의 극악의 환경을 가진 캠핑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 캠핑장에는 특이하게 토끼가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었다. 한 마리 잡아서 저녁거리로 써볼까 했지만 야생 토끼라 그런지 동작이 플래시맨 수준으로 빨라서 내 달리기 실력으로는 어림 없었다. 설사 잡는다고 해도 현지 사람들이 보면 야만인 취급 받기 십상일 것이다.
샬레에서의 쾌적한 하루를 보낸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앙부아즈(Amboise) 성으로 갔다. 앙부아즈는 16세기에 신교도 수천 명이 잔인하게 처형되었던 ‘앙부아즈의 음모’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마지막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성 바깥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특이한 복장의 아주머니 들이 카페 옆 길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세시대의 드레스 같은 옷을 입었는데 성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관광객인지는 잘 모르겠다. 핸드백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로 치면 한복 같이 전통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관광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간 성은 쇼몽(Chaumont) 성이다. 이 성은 다른 성들에 비해서 크지도, 유명하지도 않지만 성 안에 여러 설치미술들이 있어서 좀 색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첫 날에 간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한국의 이우환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을 봐서 반가웠는데 쇼몽 성은 성의 내 외부 거의 모든 곳이 설치미술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성의 각 방들의 벽들을 미술 작품의 캔버스로 활용하기도 하고, 외부의 마구간을 통째로 설치미술 작품으로 채운 경우도 있었다. 성의 여러 방 중에 몇 개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창고로 보였는데 그 잡동사니의 쌓인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 자세히 보니 그것도 설치 미술이었다. 올해의 작품 전시 일정이 게시되어 있었는데 여러 작가 중에 한국 작가도 있어서 반가웠다.
블루아성은 앙부아즈 성처럼 도시 한 가운데 서 있어서 어디가 성이고 어디가 도시의 다른 건물인지 구분이 잘 안가는 곳이다. 이곳은 프랑스 왕인 앙리 3세가 여왕 마고의 연인이던 기즈공을 암살한 곳이라고 한다. 기즈공은 앞서 언급한 앙부아즈성에서 신교도들을 학살한 장본인인데 블루아성에서는 본인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여왕 마고와 앙리 3세, 그리고 기즈공을 둘러싼 이야기는 하도 복잡해서 아무리 봐도 누가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인지 혼란스럽지만 음모와 배신, 비극적 사랑이 점철된 역사였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샹보르(Chambord) 성이었다. 루아르 강가에 있는 많은 성들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곳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들었다는 이중 나선 계단이 유명한 곳인데, 루아르 고성들 중에는 이렇게 다빈치와 인연이 있는 곳이 많은 것 같다.
아쉽게도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 도착했기 때문에 내부는 관람할 수 없었고 외관만 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공사 중인지 가운데 지붕에 설치된 커다란 비계 때문에 그 웅장한 자태를 온전히 볼 수 없어서 더더욱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섯 시가 넘어서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는 건 그나마 좋은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