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알비-카르카손
뜻밖의 만남을 뒤로하고 알비(Albi)로 이동해서 또 다른 이비스 호텔에서 묵었다. 전날 묵었던 부르주 이비스 보다는 좀 오래됐지만 훨씬 넓고 쾌적한 느낌이었다. 알비에는 동양인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 듯 리셉션 아가씨가 신기해하는 눈치다.
아침 일찍 알비 시내를 둘러봤는데 조그마한 중세도시라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제일 먼저 호텔에서 멀지 않은 세실 성당으로 향했다.
세실 성당은 여러모로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데 고딕 양식으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인 고딕 성당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고딕 성당들은 일반적으로 하늘높이 치솟은 첨탑의 횡력을 지지하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라는 특유의 지지 구조를 가진다.
세실 성당에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없고, 대신 무식하게 두꺼운 벽으로 지지하는 구조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실 성당의 외관은 성당 보다는 거대한 성에 가까운 모습이다. 적어도 루아르 고성지대의 우아한 성들 보다는 훨씬 더 성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세실 성당이 이런 외관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13세기에 알비는 카타리파라는 이단 교파의 본거지였는데 교황청은 잔혹한 전쟁을 거쳐 이단 교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세실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세실 성당이 위압적인 모습의 외관을 갖게 된 것은 이단으로부터 카톨릭을 지키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이단 교파에 대해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의 내부는 외부의 둔탁한 모습과는 달리 화려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오르간 중 하나라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내부에 자리잡고 있고 모든 벽은 정교한 조각상 들로 장식되어 있다.
세실 성당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로트렉 미술관이 나온다. 고성을 개조해서 미술관으로 만들었는데 건물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경험이다.
물랭루즈의 화가라고 불리는 로트렉은 알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집안 대대로 이어진 오랜 동안의 근친 결혼 때문인지 허약하게 태어난데다 어릴 적 사고로 다친 후 키가 크지 않는 치명적인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파리 몽마르트 환락가에 아뜰리에를 마련한 후 로트렉은 지나친 음주로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주변의 화류계 여성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다. 로트렉 미술관인데도 로트렉의 중요한 그림들은 대부분 파리로 가 있어서 생각보단 볼게 많지 않은 것은 아쉬웠다.
로트렉 미술관을 보고 나서 알비 시내를 둘러 보았다. 시내 가운데를 흐르는 강 주위로 중세시대 느낌의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아기자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나중에 본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부근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알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도시의 규모도 작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지만 마치 숨겨진 보석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알비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쯤 가면 카르카손이라는 중세의 성채도시가 나온다. 프랑스 남서부의 스페인 접경지대에 위치해서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처음에는 로마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고 성벽을 건설한 후 13세기에 기존의 성 안팎에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또 성을 쌓아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몇 일 전에 보았던 루아르 고성지대의 우아한 성들과는 반대로 오직 전쟁만을 위해 만들어진 성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카르카손이라는 이름은 로마 군대 이후에 성을 차지하게 된 사라센 족 왕비의 이름인 카르카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프랑크족 왕인 카를 대제가 막강한 군대로 수개월간 성을 포위하고 식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카르카스 왕비는 돼지에게 콩을 잔뜩 먹여서 성 밖으로 던지게 했다.떨어져 죽은 돼지 배에서 콩이 잔뜩 나오자 카를 대제는 돼지에게 콩을 배터지게 먹일 정도면 아직 식량이 성안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군사를 물리고 철수했다.
비록 이민족의 왕비이지만 그 지혜를 높이 사서 후세 사람들이 도시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이후 여행 내내 대체로 흐리거나 비가 오는 등 날씨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여행 내내 기분도 처지는 느낌이었는데, 지중해 부근으로 내려 오니 날씨가 그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도 조금씩 상쾌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