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아를-엑상프로방스
아를은 고흐가 한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여러 걸작을 남긴 곳이다. 고갱과 함께 지내다 싸우고 불화로 헤어지고 귀를 자른 것도 모두 아를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아를로 돌아왔을 때 불안한 주민들이 고흐를 감금해 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이바람에 고흐는 한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를의 많은 사람들이 고흐 덕분에 먹고 살고 있으니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쾌적한 날씨뿐만 아니라 도로변에 펼쳐지는 프로방스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답다. 집이나 거리의 풍경도 그렇지만 들판이나 나무들도 뭔지 모를 포스를 가진 듯 하다. 프로방스를 지나 바로 다음 행선지로 들른 이태리 북부에서 느낀 실망감은 프로방스와의 비교 때문에 더 커진 것일 것이다. 가장 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프로방스 지방을 꼽을 거 같다.
아를의 아레나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려고 보니 주차할 곳이 마땅찮다. 겨우 주택가의 한 자리를 찾아서 차를 세우고 주차 미터기에 동전을 넣으려고 하는데 건물 안에 있는 한 아주머니가 나보고 뭐라고 열심히 얘기를 한다.
영어는 못하는지 프랑스 말로만 한참을 얘기하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더 듣다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주차 요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 거 같다. 이쪽 사람들은 별로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모두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아를의 아레나는 님의 것과 비슷한 규모에 비슷한 느낌이고 현재도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것도 비슷하다. 들어가서 볼까 잠시 고민했는데 주변을 돌다 보니 밖에서도 안이 다 들여다 보여서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옛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고흐가 밤의 카페(Le café lanuit)를 그렸던 바로 그 카페가 나온다. 명화에서 보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니 뭔가 대단한 역사적 장소에 와 있는 느낌인데 현지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다. 다만 이 부근에서 잘 볼 수 없었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 카페에 세 팀이나 와 있는 것으로 보니 고흐가 한국에선 역시 대단한 인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의 밤의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와 맥주를 시켜서 먹고 있자니 비록 낮이지만 어디선가 이젤을 세워두고 이쪽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고흐의 눈길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중에 가게 된 파리 근교에 위치한 오베르 마을에서의 고흐 그림은 고통으로 뒤틀린 느낌인데 반해 아를에서의 고흐 그림들은 대부분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어서 좋았다.
아를 구경을 마치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엑상프로방스로 이동했다. 세잔의 고향이자 세잔이 사랑한 분수의 도시라는 엑상프로방스는 이름에 걸맞게 도시 곳곳에 100여 개 아름다운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직접 가서 본 엑상프로방스는 아를이나 님에 비해서는 뭔가 고급스럽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는 미라보 거리가 유명한데 마침 일요일이라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어서 천천히 돌아보며 구경했다. 장신구나 그림 같은 아트 적인 요소가 들어간 물건들이 많았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예쁜 것들이 많아서 와이프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구경했다.
거리에서 파는 것 치고는 꽤 비싼 편이었지만 프로방스의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장인의 손재주로 만든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700년대부터 이어져오고 있다는 가장 오래된 카페를 찾아가서 음료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카페를 배경으로 길 건너편에 와이프가 서서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갑자기 차 한대가 와이프 뒤에 서서 카페의 시야를 가린다. 조금 놀라서 뭔 일인가 쳐다봤더니 차 안에 탄 흑인들이 낄낄거리며 잠시 동안 서 있더니만 금방 떠난다. 아마도 프로방스식 조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