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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Jul 27. 2018

보라색 세상 발랑솔

2.11. 발랑솔-베르동 협곡

엑상 프로방스에서 북쪽을 향해 한참 산길을 가다 보면 라벤더로 유명한 발랑솔이 나온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보라색의 라벤더 밭은 이곳 프로방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인데, 거친 자갈밭에서 잘 자라는 라벤더의 특성과 이곳의 토양과 기후가 잘 맞는다고 한다. 


한참을 산길을 돌아 가다 보니 갑자기 길옆에 세워진 차들과 보라색 밭 속에서 점점이 박혀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드디어 발랑솔의 라벤더 밭에 도착한 것 같다. 기대했던 대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보라색 물결은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라벤더 향기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데 가만히 냄새를 맡으면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지만 꽃을 비비면 훨씬 강한 향기가 났다. 


발랑솔의 보라 빛 라벤더 들판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어서 한국에서도 라벤더 밭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마도 비닐하우스가 아닌 야외에서 라벤더가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벤더를 즐기는 사람들. 중국 단체관광객들이 특히 많았다.


아쉬운건 라벤더 밭 안에 점점이 박혀서 시끄럽게 떠드는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온전히 즐기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20년 전 배낭여행에서 본 중국인들은 현지 중국집의 떡진 머리의 종업원들 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전세계 어딜가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과 만나게 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심지어 사람 구경하기 힘든 아이슬란드 오지에서 단체버스로 돌아다니는 중국인들을 마주치고 놀란 적도 있다. 이들을 보면 중국 경제의 발전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지만, 그들이 경제력에 걸맞는 매너는 아직 갖추지 못한 거 같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베르동 협곡의 시작 지점. 짙은 옥색의 물빛이 신비롭다


발랑솔의 향기를 뒤로 하고 유럽 최대의 협곡이라는 베르동 협곡을 향해서 계속해서 산길을 올라갔다. 프랑스는 대부분 국토가 평지이지만 알프스가 가까워지는 남쪽으로 갈수록 높은 산과 험준한 계곡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베르동 계곡은 프로방스 지역에 위치한 깊은 계곡인데 옥색의 신비한 물빛과 커튼처럼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절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럽 최대의 협곡이라는 베르동 협곡. 아슬아슬한 절벽 아래로 옥빛 물이 흐른다.

 

계곡을 따라 나 있는 도로는 좁고 급경사에다 급한 커브가 반복되어 운전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곳이어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운전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오토바이 두어 대가 뒤쫓아오는 거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오토바이로 쫓아오다가 펑크를 내고 도와주는 척 하다가 물건을 훔쳐 도망가거나 유리창을 깨고 가방을 낚아채 가는 등의 흉흉한 후기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따라붙나 싶더니만 안보여서 마음을 놓았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수십 대가 뒤에서 떼거지로 나타난다. 본격적으로 패거리를 불러와서 떼강도 짓을 벌이려나 싶어서 맘 졸였는데 한참 따라오다가 아무일 없이 그냥 우리를 지나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베르동 협곡은 유럽의 라이더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때문인지 떼지어 다니는 라이더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는데, 이 곳뿐만 아니라 알프스나 돌로미티 같은 험준한 고갯길에는 어김없이 수많은 바이크족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대부분의 라이더들이 비싼 바이크에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은 중년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오토바이가 사고에 취약하다는 인식은 우리나라와 같은지 오토바이의 위험성을 묘사한 포스터들이 도로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아마도 보험사들이 제작한 것 같았다.

 

베르동 협곡에서 만난 아이벡스 떼, 우두머리인 듯한 가운데 숫놈의 위엄은 대단했다.


구불구불 고갯길을 한참을 가다 보니 차 한대가 길 중간에 서 있어서 속도를 줄이고 무슨 일인가 보니 길 한가운데 수많은 염소인지 양인지 모를 동물들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알프스 지역에 사는 야생 염소인 알파인 아이벡스(Alpine ibex)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거대한 뿔과 흰 수염이 인상적 아이벡스가 있었는데 아마도 무리의 우두머리인 숫놈인 것 같았다.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거나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응시하는 모습이 뭔가 포스넘치는 모습이었다. 


“어머, 쟤네들 꼬추가 엄청 커!” 


아이벡스 떼를 보던 와이프가 갑자기 감탄하며 소리친다.  가끔 와이프가 대단한 관찰력을 보일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세히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좀 더 있다가는 염소와 비교당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서둘러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가까이에서 본 아이벡스 무리

                                              

아이벡스 무리를 구경하느라 지체한 탓인지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리셉션은 닫혀 있었지만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해 두었기 때문에 이리 저리 수소문해서 담당자를 찾아서 캠핑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캠핑장들이 예약을 안하고 가면 조금만 늦어도 뻔히 빈자리들이 많은 게 보이는 데도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사전 확인과 예약은 필수였다. 


캠핑장 시설은 좋은 편인 거 같지만 산 위로 올라와서 그런지 어제보다 훨씬 추워진 날씨 때문에 옷을 단단히 껴 입어야 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프랑스의 도시 지역이나 다른 곳과 달리 이곳에서는 거의 유색인종을 볼 수 없고 백인들뿐이어서 우리를 바라보는 조금은 불편한 시선을 느껴야 했다는 점이다. 유색인종에게 관대하다고 알고 있는 프랑스이지만 어딘가 보이지 않는 구석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 프랑스 산간 마을의 벼룩시장


베르동 협곡에서의 추운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따뜻한 지중해의 따뜻한 햇볓을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니스와 칸, 모나코를 거쳐서 이태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는 것인데 코트다쥐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도로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다. 


한참을 가다 보니 길가에 차들이 잔뜩 세워져 있고 언덕 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우리도 일단 차를 세우고 올라가보니 벼룩시장이 열린 듯 하다. 사람들이 여러가지 물건을 잔뜩 실어 와서 팔고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장터가 열린 곳이 마을이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산 밑의 언덕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부근 여러 마을에서 날짜를 정해서 이곳에 모여서 벼룩시장을 여는 듯 하다. 


다들 집에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서 팔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시골 장터와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모여서 서로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는 듯 했는데, 물건 팔기 보다는 삼삼오오 모여서 화창한 날씨를 즐기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주목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집에서 쓰던 유리 그릇 들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몇 십 년도 더 된 거 같아 보이지만 장인의 꼼꼼한 솜씨로 만들어진 거 같아서 와이프가 너무 마음에 들어 했다. 이것 저것 물어 보고는 사기로 결정하고 가격을 흥정하니 흔쾌하게 우리가 원하는 가격으로 주겠다고 한다. 너무 쉽게 흥정이 이루어지니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길 위에서 만난 즐거운 순간이었다. 


와이프는 한 할머니로부터 그릇 세트를 충동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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