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트롤통가-보스
노르웨이에서 3대 트래킹 루트를 꼽으라면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 세라그볼텐(Kjeragbolten), 트롤퉁가(Trolltunga)를 꼽을 수 있다. 프레이케스톨렌은 제단 바위라는 뜻인데 절벽 위에 제단처럼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곳이고 세라그볼텐은 두 절벽 사이에 둥근 바위가 끼어있는 곳이다.
우리가 가야 할 트롤퉁가는 거의 천 미터에 달하는 절벽 꼭대기에 혓바닥처럼 길게 바위가 튀어나온 곳인데 사람들이 혓바닥 위에서 뛰기도 하고 걸터앉아 있는 사진을 찍기도 하는 곳이다.
다 인터넷에서 쉽게 사진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노르웨이 피요르드를 대표하는 경치인데 문제는 전부 몇 시간씩 트레킹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트롤퉁가가 가장 길어서 왕복 10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트롤퉁가로 가기 위해서는 한 시간쯤 더 운전해간 다음에 샛길로 빠져서 다시 산길로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중간에 피요르드를 건너야 하는 곳이 있었는데 당연히 페리를 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바다 아래로 터널이 나 있다.
상당히 긴 터널이었는데 터널 중간에 분기점이 있어서 로타리가 설치되어 있다. 유럽에는 로타리가 많고 특히 노르웨이에는 거의 모든 교차로가 로타리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터널 안에 로타리라니.. 안 봐도 엄청난 난이도의 아닌 토목공사였을 거 같다.
노르웨이에는 터널이 하도 많아서 어지간한 터널 안에는 불도 안 켜있고 터널 내벽 마감도 그냥 바위를 뚫은 그대로 모습으로 내버려 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라는 느낌으로..
그런데 이 터널 안에 있는 로타리는 자기들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는지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이 되어 있다. 로타리를 비추는 푸른 조명 때문에 터널 속 로타리는 마치 UFO와 같은 멋진 모습이다.
트롤퉁가로 빠지는 샛길에 거의 온 거 같은데 표지판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서 잠시 헤매다가 마침 길 옆에 서있는 트럭에 타고 있는 노가다 아저씨에게 길을 물어서 겨우 찾아 갔다.
동지적 연대감 때문인지 노가다 아저씨들은 항상 반가운 느낌이다. 우리나라 노가다 아저씨들이 한밤중에 사람들 몰래 공사하느라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이쪽 아저씨들은 복 받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트롤통가로 올라가는 길은 차 한대만 겨우 갈 수 있는 좁은 길이어서 반대편에서 차라도 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데 아침 시간에는 전부 올라가는 차들 뿐이어서 별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트롤퉁가 주차장에 거의 도착해서야 표지판이 나타난 것을 보면 트롤퉁가가 아직은 대중적이지는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서 올라갈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단체로 온 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다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올라가려는 걸 보니 위쪽 어딘가에서 캠핑을 하려는 모양이다.
트롤퉁가로 가려면 먼저 산을 올라간 다음에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4시간쯤을 가야 하는데 처음 산을 오를 때 산길로 걸어 올라가는 것과 푸니쿨라 철로를 따라 올라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예전에 꼭대기로 올라가는 열차 비슷한 푸니쿨라가 운행되었다고 하는데 안전상의 문제로 지금은 폐쇄되어 운행되지 않고 대신 그 철로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다.
푸니쿨라 철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산길보다 약 30분 정도 절약된다고 해서 우리는 그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권셰프가 먹을 것이랑 물이랑 해서 무겁게 배낭을 꾸리길래 위에 올라가면 물이 있다고 하니 물은 가져가지 말자고 했는데 그냥 자기가 지고 가겠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감을 보인다. 부디 그 자신감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기를...
본격적으로 푸니쿨라 길을 타고 올라갔는데 금새 보기보다 엄청나게 힘든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별 것 아닌 것 보이지만 경사가 한 60도 정도 되는데다가 나무 계단이 엄청 많아서 한 오분 올라가다 쉬다를 반복해야 했다.
나중에 내려올 때 계단 수를 세 봤는데 정확하게 2,500계단이었다. 어제 올레순드에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공포의 418계단 어쩌고 하는 글을 봤는데 2,500 계단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계단도 아니고 푸니쿨라 철로를 받치는 나무 판자로 된 침목 같은 것을 밟고 올라가는 거라서 신경을 제대로 안 쓰면 발을 헛디뎌서 침목 사이로 발이 빠지거나 미끄러지기 쉬웠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어야 했다.
자기가 짐을 다 짊어지고 갈 테니 신경 쓰지 말라던 권셰프는 한 10분쯤 가더니 도저히 못 가겠는지 퍼져버려서 그때부터는 셋이 돌아가며 지고 올라가야 했다.
겨우 정상에 도착해서 잠시 쉬고는 트래킹을 하는데 이게 또 만만찮은 길이었다. 인터넷에는 일단 정상에만 올라 가면 그 다음부터는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고 써있는데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어 안 그래도 풀린 다리에 죽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인터넷에 평탄하고 쉬운 길이라고 쓴 거야?”
다들 욕을 하면서 힘들게 걸어갔다. 그래도 비록 다리는 힘들었지만 눈은 호강하는 길이었는데 다채로운 풍경들이 계속 바뀌면서 나타나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노인들이나 여자들도 많이 가고 있었는데 한 할아버지 할머니 커플은 가는 내내 손을 꼭 잡고 가고 있어서 너무 부러웠다. 나중에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할 텐데..
중간에 절벽 위에 조그마한 호수 같은 곳이 있었는데 호수 앞에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다. 그런데 텐트는 친 지가 꽤나 오래된 듯한 느낌이고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처럼 주변에 코펠이나 옷가지 같은 것이 줄을 지어 하나씩 버려져 있어서 도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우리끼리 추론해 본 결과 아마도 누군가 캠핑을 하다가 너무 추운 날씨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하나씩 내버리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거 같다고 결론 지었다.
한참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니 피요르드가 나타난다. 노르웨이 5대 피요르드 중 하나인 뤼세 피요르드다. 조금 더 가니 피요르드가 시작되는 곳쯤 절벽 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트롤퉁가에 도착한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서 한 명씩 바위 위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트롤 혓바닥 위는 생각보다 넓고 평평해서 그 위에 서도 그렇게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들고, 옆에서 지켜 보는 것이 훨씬 더 무섭고 식은땀 나는 광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혓바닥 위의 친구나 가족을 찍기 위해 반대편 절벽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오히려 절벽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훨씬 더 위험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기 때문에 혓바닥에 올라간 사람들은 뭔가 색다른 퍼포먼스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듯 하다. 새롭거나 아슬아슬한 퍼포먼스를 하면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한 젊은 아가씨가 비키니 차림으로 각종 포즈를 취해서 많은 박수를 받고 있었다.
우리도 한 명씩 올라가서 사진을 찍기로 하고 권셰프부터 올라갔다. 권셰프는 점프도 하고 바위 끝에도 걸터앉더니만 마지막엔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고 돌아왔다. 권셰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다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정차장이 그 다음으로 올라가서 각종 포즈를 취하고 점프도 했지만 바위에 걸터앉지는 못했다. 아마도 아들 생각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나 역시 그냥 바위 중간에 서서 포즈를 취하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았지만 바위 끝에 걸터앉으려니 등에서 식은 땀이 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까지 와서 그냥 갈수는 없었기 때문에 겨우 용기를 내서 바위 끝에 앉았다.
이 순간에 갑자기 돌풍이 분다던가 해서 중심을 잃어버리면 바로 천 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이겠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어지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아래로 떨어질 거 같아서 그 정도로 마무리 하고 내려왔다.
정차장이 자기도 바위 끝에 걸터앉을 걸 그랬다고 했는데 막상 다시 가보라고 해도 가지는 않았다.
대단히 위험한 곳이기는 하지만 아직 떨어져 죽은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에 호주 아가씨 하나가 떨어져서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삼가 명복을...
점심을 먹고 한 시간쯤 트롤퉁가에서 머물다가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배낭을 지고 온 사람들이 텐트를 쳐 놓은 것을 보았다. 늦은 시간에 캠핑을 하기 위해 큰 배낭을 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조그만 배낭 하나도 셋이 겨우 번갈아 가며 들고 올라왔는데 저렇게 큰 배낭을 어떻게 지고 올라오는지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그래도 다음 번에 다시 온다면 어떻게든 배낭을 지고 올라와서 텐트를 치고 뤼세 피요르드를 내려다보며 캠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아까 혓바닥 위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포즈를 취하던 여자 일행이랑 얘기를 하게 되었다. 중국인 들이라고 했는데 비키니 여인은 빨간 머리로 염색을 한데다 담배도 뻑뻑 피는 것이 뭔가 자유로운 영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한국말로 인사도 하는 걸 보면 한류의 영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니쿨라 계단을 내려와서 주차장으로 와서 차 문을 여니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차 안에 두었던 우리의 마지막 생선 세 마리가 썩는 냄새였다. 창문을 살짝 열어서 통풍을 시켰어야 했는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새로 물고기를 잡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보스를 향해 가는 길에 히테를 구해서 하루 쉬어가기로 했는데 조용한 위치에 가격까지 싸고 브리짓 바르도를 닮은 주인 할머니가 친절해서 여기서 이틀을 묵고 가기로 했다. 주인 할머니는 젊었을 때 꽤나 미인이었을 것 같다는 것이 우리 셋의 공통된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