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드골공항-파리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채플린이 했다는 이 말처럼 견디기 힘들만큼 괴로운 순간도 지나고 보면 그만큼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여행 내내 힘든 상황에 처해도 이말을 떠올리며 여유를 가지려 노력했지만, 시작부터 나에겐 이런 여유를 찾을 틈도 없이 당황스러운 순간이 반복되었다.
오랜만에 장시간 비행 후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리스카를 받기 위해 대행사로 전화해서 픽업을 요청하고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는데 그때부터 뭔가 하나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픽업 장소인 게이트 앞은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경사로 옆이어서 아무리 봐도 픽업 차량이 설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끔 수상해 보이는 흑인들이 담배를 피우러 왔다 갔다 할 뿐 인적도 드문 곳이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예전에 와본 공항인데 전혀 기억이 없고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 또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픽업 차량이 안 와서 연락을 시도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화 연결도 잘 안되었다. 도착 시간이 이미 저녁이어서 차를 찾고 파리 시내 숙소까지 가기엔 여유가 없어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라는 우리말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니폼 차림의 흑인 여자 둘이 서 있었다. 공항이나 항공사 직원 같은데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이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예전 무한도전에서도 드골공항에서 한국말하는 직원들이 여럿 나왔는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분들과 얘기하다 보니 내가 도착 층과 출발 층을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대행사와 통화하면서 그쪽에서 말하는 것을 대충 들은 내 잘못이었는다. 와이프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고 큰소리를 쳐 놨으니..
겨우 픽업 나온 리스카 회사 직원을 만나서 차를 받으러 이동했다. 간단한 서류 작성 후 예약했던 차를 받으니 드디어 여행을 시작한다는 실감이 났다. 짐을 대충 쑤셔 넣고 멋있게 출발하려고 했는데 왠 일인지 출발도 못하고 시동이 계속 꺼진다. 원인을 몰라 한참 해메다 익숙치 않은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가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담당 직원이 설명을 했는데 또 대충 흘려듣다가 생긴 문제였다. 와이프가 째려보는 시선이 점점 더 아프게 꽂힌다.
겨우 출발을 하긴 했는데 유럽에서의 첫 운전이 만만치 않다. 도로 구조도 생소하고 교차로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로터리도 잘 적응이 안된다. 리스카는 새차로 출고되기 때문에 기름이 조금밖에 들어있지 않아 차를 받는 즉시 주유부터 해야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유소가 안보인다. 리스카 직원이 가까운 주유소 위치를 알려줬지만 대충 들어서인지 제대로 못찾고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말았다. 주유 경고등은 이미 들어왔는데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려면 한참이어서 불안에 떨며 운전하다 겨우 주유할 수 있는 휴게소를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거의 대부분 유럽 주유소들처럼 여기도 셀프 주유소인데 안내 화면이 불어로만 표시된다. 대충 눈치로 결재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해도 안된다. 도움을 요청하려 안으로 들어가서 직원에게 얘기하니 역시 프랑스답게 영어를 못한다. 결국 한참을 손짓발짓 해서 해결을 하긴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주유기에서 내 카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후엔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왜 처음 만난 주유소에서 그런 일이 생긴건지는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예정된 시간을 한참 지난 밤 늦은 시간에 예약해 두었던 파리 시내 숙소에 도착해 보니 마지막 시련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호텔 리셉션이 닫혀 있고 담당자가 이미 퇴근해버린 것이다. 경험이 쌓인 후라면 이정도는 별일 아니었지만, 여행 첫날부터 파리 뒷골목에서 노숙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정신을 좀 가다듬고 찬찬히 살펴보다 리셉션 부재시 안내문과 연락처를 발견하고 전화를 걸었다. 겨우 연결된 담당자는 알아듣기 힘든 프랑스 엑센트의 영어로 방법을 알려 주는데, 한참 얘기해보니 현관 번호 키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내부로 들어가면 우리 방 열쇠를 보관해 둔 금고가 있으니 찾아서 방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인 것 같다.
문제는 알려준 대로 현관 번호키를 눌러 봤지만 아무리 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전화해서 한참을 전화로 옥신각신하다 결국 비밀번호의 마지막에 ‘#’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샾을 불어로 발음한 거 같은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한참을 옥신각신 했던 거였다.
천신만고 끝에 호텔방에 들어가니 피곤이 몰려온다. 에펠탑이 보인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옆건물 지붕 위로 겨우 꼭대기 부분만 보여서 조금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파리의 호텔방들은 에펠탑이 얼마나 잘 보이냐에 따라서 가격이 매겨진다고 하던데 그렇게 싼 가격에 에펠탑이 보인다고 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그런건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첫날 여러 차례 공황상태에 빠졌던 우리로서는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으니까.
오늘의 여러 비극도 지나고 보면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희극이 될거라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래도 오늘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도 너무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