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파리-베르사이유
시차 때문인지 일요일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어차피 잠도 안 오고 멀지도 않아서 해뜨기 전에 에펠탑을 걸어서 보고 오기로 했다. 새벽 시간이어서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고 하루도 알차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며 문밖을 나섰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섯 시가 좀 넘어서 호텔을 나섰는데 밖은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나름 큰길이 안전할 거 같아 센강을 따라 에펠탑을 향해 걸어 갔는데, 인적이 드문데다가 어두운 길 구석 구석에 노숙자인지 취객인지 모를 흑인들이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출발하자 마자 아차 싶었지만 일단은 그냥 계속 가기로 했다.
와이프도 나도 새벽 공기가 좋니 센강 경치가 아름답니 대화는 이어나갔지만 주변의 낯선 사람을 경계하며 두리면 거리며 걸었다. 한참을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은 끝에 에펠탑에 겨우 도착했다. 한국 생각을 하고 별생각 없이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에펠탑을 담은 많은 사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차대전 중에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가 에펠탑을 배경으로 일행들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진이다. 나치 군대에 의해 파리가 함락 위기에 놓였을 때 프랑스 정부의 결정은 그냥 파리를 내주고 철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문화재 파괴를 우려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하는데, 그 때문에 그 히틀러 사진에서의 에펠탑과 파리는 전쟁과는 상관 없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히틀러 사진이 찍힌 장소인 센강 건너편 샤이요궁 앞 광장으로 가 보았다. 지금은 1유로짜리 중국산 싸구려 에펠탑 모형을 팔려는 흑인 잡상인들과 에펠탑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는 연인들만 각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도 한편에 앉아서 한참 동안 해 뜨는 새벽녘의 에펠탑을 지켜본 후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후 베르사이유 궁전을 다녀오기로 했다. 파리 시내에서의 운전은 여전히 스트레스였지만 어제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것 같다. 사십 분 정도 운전해서 베르사이유에 도착했는데 궁전에 입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선 줄이 엄청나게 길다. 예전에 왔을 때도 줄 때문에 정원만 구경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줄을 서서 기다려 보려 했지만 갑자기 비내리는 추운 날씨로 바뀌어 먼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적당한 식당을 찾던 중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이 있어서 들어가고 보니 손님이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었다. 단체손님인 것인지 아니면 뭔가 노인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파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교무실에 불려 들어가는 학생처럼 불편한 느낌이다. 게다가 식당 안에는 역한 냄새가 났는데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인지 어디 하수구라도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시 나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요란 떠는 것 같기도 해서 일단은 그냥 먹기로 하고 음식을 주문했는데 메뉴 판이 전부 불어로 되어 있어서 대충 감으로 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대충 스테이크로 보이는 걸로 주문하고 와이프는 오리 다리 요리를 주문했는데, 막상 나온 음식은 육회였다. 그러고 보니 스테이크 뒤에 타르타르 어쩌고 하는 말이 붙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육회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 육회는 신선하지도 않고 비주얼도 맛도 심상치 않았다. 옆자리 유럽 노인들도 우리가 이상한 것을 먹는다고 생각했는지 힐끗힐끗 쳐다본다. 음식을 가릴 처지는 아니였으니 반쯤 맛 간듯한 육회와 와이프가 느끼하다고 먹다 만 오리 다리까지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식사와 휴식 후 다시 베르사유로 갔는데 이번에는 궁전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바로 정원 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마리 앙뜨와네뜨의 정원이라는 트리아농으로 가면 줄을 안 서도 된다는 글을 봤기 때문인데, 진짜로 줄이 없었을 뿐 만 아니라 차를 타고 베르사유 정원의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어서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비 오는 날씨에 그 넓은 정원을 걸어서 돌아다니는 건 우리 컨디션으로 볼 때 무리였을 것 같다.
정원을 돌아다니다 보니 백조 떼와 자주 마주친다. 젤 큰놈한테 과자를 주다가 손을 물렸는데 꽤 아팠음에도 웃으며 지켜보는 사람들 때문에 아픈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자고로 백조는 우아함의 상징일 텐데 베르사유부터 시작해서 유럽 도처의 백조들은 사람들이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이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의 비둘기떼 같은 느낌이어서 조금은 씁쓸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와서 호텔로 다시 돌아와서 와이프 친구 은령씨 커플을 만났다. 친구 커플은 파리에서 살면서 미술 작품활동도 하고 부업으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었는데, 현지인들만 아는 괜찮은 맛집이라며 우리를 안내했다. 고급스런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는데, 푸아그라와 달팽이 요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프랑스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푸아그라는 고소하면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맛이었고 달팽이도 소라랑 비슷한 괜찮은 맛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특이한 전채 요리를 먹고 메인 요리가 나왔는데 리모주라는 지방에서 나온 소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라고 한다. 은령씨가 예전에 리모주를 여행했을 때 너무 맛있게 먹었다며, 앞으로 여행을 하려면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고 꽤나 많은 양의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문제는 고기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차 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추운 날씨 때문에 몸살 기운까지 있는데다, 이런 저런 전체 요리를 다 먹어 보느라 미리 배를 채우는 바람에 정작 스테이크는 한 조각을 먹고는 더 이상 먹기 힘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먹어 치웠겠지만 몸 컨디션 때문에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친구 커플에 미안하게도 꽤 많이 남기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까지 내 컨디션은 나아지지 않았다. 배까지 너무 부르고 소화도 안되어 자리를 정리하고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멍한 상태가 계속되어서 이 상태로 계속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의심될 정도였다. 와이프도 불안한 표정인 듯 하다. 내일부터는 파리를 떠나 본격적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컨디션이 계속 안 좋으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지기를 기대하면서 불편한 속을 달래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