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7일
아즈마 히로키와 사토 요시유키 그리고 고쿠분 고이치로 및 사사키 아키라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적 문제는 라캉의 탈구축을 극복하고 탈구축의 가능성을 재사유하기이다.
라캉의 탈구축 이론의 핵심은 상징계 내부에 상징화될 수 없는 결여를 발견함으로써 실재를 드러내는 형식성에 있다. 전체를 형식화하고 해명되지 않는 잉여(실재)가 있다는 사실이 체계를 불완전하게 한다.
수학자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가 증명하듯 체계 내부에는 증명되지 못한 공리가 반드시 하나는 존재한다는 원리와 같다. 그렇다면 모든 체계는 불완전하고 언제나 그것의 부정 끝에는 설명되지 못하는 결여(구멍)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의 탈구축은 연구자의 형식적 유희로 끝나버릴 위험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왜 유럽/남성/이성애적 텍스트가 탈구축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선택되는가? 아즈마 히로키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바바라 존슨의 이론을 비판하며 말하듯 탈구축될 대상의 선택 그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다.
라캉의 실재 개념은 언제나 상징계 '전체'를 참조하고, 결여 혹은 봉합 불가능성을 발견하는 부정의 방식을 통해 구조화된다. 즉 라캉의 탈구축은 상징계의 균열을 구조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의 방식으로 전체성을 보존한다. 이러한 탈구축의 방식을 아즈마 히로키는 부정신학의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부연하면 정과 반의 명제들을 전부 부정함으로써 동일한 결여를 도출하고 그 허무의 심연 속에 두 명제를 동일화시킨다. 즉 단수의 초월론적 심급으로의 환원이다.
예컨대 화폐상품설과 화폐법제설은 서로 대립되지만 "(두 이론)모두 화폐라는 존재 중핵에 있는 공허를 참을 수 없었다."와 같은 진술을 통해 동일화된다. 두 명제는 서로 대립되지만 심연의 공허라는 결여 속에서 단수화된다. 결과적으로 결여는 두 명제의 차이를 말소한다.
이렇듯 라캉은 팔루스라는 결여의 시니피앙을 중심으로 시니피앙의 잡다한 집합을 상징계라 명명함으로써 전체화한다. 그로 인해 시니피앙의 복수적 전달체계 전체의 차이와 복수성이 말소된다. 즉 라캉은 체계의 결여/구멍을 전체화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예측 가능한 불가능한 외부를 상정함으로 역설적으로 체계를 안정화한다.
시니피앙의 연쇄 속에 대상 a(타자)와 마주하는 분열된 주체는 언제나 욕구와 대상 사이의 어긋남 사이에서 결여를 체험하고 그 간극에서 욕망한다. 이때 대상 a라는 인식 불가능한 심급은 언제나 주체의 초월론적 심급으로 작용하며 그것과 분리 불가능하다.
앞서 분열된 주체는 초월론적 심급으로 작용하는 타자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토 요시유키에 의하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된 주체,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말하는 복종을 내면화한 규율적 주체로 생산된다.
즉 주체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타자에게 내어줌으로써 스스로 자기존재의 삶의 방식을 생산할 역량을 결여한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체제 내부에서의 저항 가능성을 상실한다.
팔루스라는 초월론적 심급은 상징계 내부에 있는 주체의 내적 역량의 결여에 기반해 시니피앙의 운동을 지속하며, 복수적 초월론적 심급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타자의 분할 가능성 그러니까 타자가 주체에게 작용하는 의사소통 경로의 지연, 수신의 실패는 고려되지 않는다.
여기서 초월론적 심급의 복수성이란 단일한 결여의 은유로 동일하게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의사소통 실패(언제나 의사소통의 실패는 서로의 차이로 발생한다.)로 인한 우발성의 결과로 작동하는 끝없는 변용과 생성의 체계를 말한다. 이에 대한 고려는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의 저항점이자 성과이다.
들뢰즈 가타리가 분열분석으로 나아가 끝없는 타자-되기를 주장하거나, 고쿠분 고이치로가 설명하듯 체계의 작동은 주체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기능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의 핵심에는 주체의 생산성에 대한 긍정이 있다.
또한 푸코가 신체의 활용과 자기배려의 윤리적 주체의 생산과 변용을 말하는 것은 탈구축의 유희에서 생산이라는 긍정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데리다가 라캉을 비판하며 환원 가능한 탈구축에서 환원 불가능한 탈구축의 방법으로 산종을 구별짓는 것, 그리고 알튀세르가 라캉의 환유적 탈구축으로 부터 벗어나 유물론적 탈구축을 시도하는 것은 결여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전제없는 구조적 우발성을 생산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사키 아키라가 라캉을 비판하고 르장드르를 인용하며 텍스트 해석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자기자신을 마주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끝없는 주체의 재구축과 변용이라는 테제의 변주이다.
문제의 핵심은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의 성과들을 거부하고 그 성과들에 냉소하는 것은 이론의 진보와 실천의 구체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사토 요시유키가 보여주듯 포스트 구조주의 성과들을 변용해 오히려 알튀세르를 재해석하며 그 저항성을 다시 살려내는 과정은 필자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론과 저항 가능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의 포스트 구조주의 담론이 거부의 대상이거나 이론적 패션이 되어 있는 현실과 다르게, 이론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새로운 접속 지점들을 만들어가는 일본 학자들의 시도가 놀랍다.
그들의 학적 도전은 벌써 십 년전에 이루어졌고, 그 성과와 인식론적 전통이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 사토 요시유키, 사사키 아타루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일본의 학문적 전통이란 이론을 도구로만 보는 우리 한국의 지리멸렬함과는 다른 것 같다. 이러한 차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