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발리바르가 논하는 칸트는 도착증자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지젝과 주판치치가 말한 바 있다.) 예컨대 구속을 통해서 자유를 열망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대립되는 관념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주체, 시민, 국가 등의 관념들은 이중구속 그러니까 이율배반적이다. 그의 주체는 강제에, 시민은 법에, 국가는 반사회성에 붙잡혀 각각의 관념은 역사 전개 과정에 따라 펼쳐진다. 우리는 그 관념의 현실화와 완성에 무한히 가까워질 뿐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렇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이런 맥락에서 전도시켜서 읽으면 영구혁명론이 된다. 언제나 사회 내부의 반사회성과 내부의 적대를 무한히 축소시켜나가는 일.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발리바르가 생각하는 정치란 이 경계 지점에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니는 한 우리는 근사치의 자유를 향유할 뿐이며, 혁명은 영원히 고통과 적대의 과정일 것이다. 국가 내의 적대, 국가와 국가의 적대는 그 경계에서 무한히 순환하며 인간의 지성과 도덕적 삶을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반작용으로서 필연적인 근본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폭력을 거부하는 반폭력의 정치가 필요함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이러한 무한 적대와 혁명 속의 삶이란 사실 개미 지옥이 아닌가? 인간은 왜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시기하는 고통을 열망하는가? 자유롭기 위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가? 혁명이란 이름으로 적대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딱히 칸트의 이름을 빌리는 발리바르의 생각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왜 존재의 고통을 견디며 인간은 살아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내 생명과 삶이 고통을 얼마나 수용하고 견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