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미학에 대해 공부할수록 그것이 넓은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의 텍스트 형식이 이론가와 연출가들 사이의 끝없는 논쟁과 진보의 산물이라는 것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규칙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가? 연극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세밀한 이론적 규칙들이 희미해지고 무대의 자율성이 커져가는 과정 속에서 지금 현재의 모습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브레히트의 연극론이 도달한 곳에서 다시 현재의 연극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하나는 포스트연극이론 중 퍼포먼스와 그것의 수행성이 지닌 의미에 대한 연구와 같은 것들이다.
텍스트가 배제된 몸짓의 미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연극 속에서 희곡 텍스트 연구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동시에 텍스트의 의미론적 범주에서 벗어난 저 자유를 이론적 범주에서 어떻게 정치사회적으로 포획하고 설명할 것인가라는 미학적 문제도 있다.
사실 18세기 이후 텍스트로서의 연극은 점차 무대와의 분리가 가시화되었고, 이제 텍스트라는 것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중이다. 연극사는 문학의 관점에서 연극미학을 정의하는 것에 대한 부정의 역사이기도 하다. 극의 총체성을 고려하는 이상 당연한 순리이다.
어쩌면 무대의 몸짓들에 미학이라는 범주는 불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결국 미학은 정의내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은 무대 위의 자유를 몇몇의 규칙들로 환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 안의 불편함이란 이러한 뜻이리라.
무대는 이미지 그 자체여야 한다는 랑시에르나 들뢰즈의 철학에 기대어보아도 오히려 나는 이론가보다 이미지를 자기 방식으로 수용하는 관객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어떤 관계맺음이 중요하다.
더불어 지금은 비평의 시대가 아닌 것 같다. 그럼 오늘의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