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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Sep 19. 2019

무엇을 믿을 것인가?

-안길호 연출, 한상운 극본의 <WHTCHER> (2019)

  지금까지 제작된 많은 수사물들이 사건의 배후에 사이코패스나 정치 경제적 권력자들을 등장시켰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감춰진 범죄자들의 범행이 드러나면서 그들을 응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 이유는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나 불법적으로 초월적인 쾌락을 향유하려는 권력자들을 응징함으로써 사회적 판타지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드라마의 판타지는 우리 사회의 내재적 불안을 희석시키고 안정적인 사회라는 믿음은 준다.


  하지만 사회를 교란하는 실재는 판타지를 초과한다. 무수한 불법과 잔혹 범죄가 일어나는 현실은 드라마가 구축한 판타지를 넘어선다. 사회 내부에서 합리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사건들은 사회 체계의 안전성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은 부와 권력을 지닌 개인의 일탈 혹은 잔혹한 사이코패스에게 돌려진다. 과거 제작된 많은 수사물들은 사건의 원인을 사적인 것으로 축소해왔다. 이 같은 접근은 시스템의 효과를 오히려 문제의 원인으로 전도시킨다. 시스템의 부정성을 악랄한 범죄자의 뒤에 숨기고 시청자들 앞에 인간이란 본질적인 내면적 추악함을 지니고 있다고 설득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의 헛된 욕망은 죄와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욕망이란 이름은 손쉽게 사회의 부정성을 숨기고 상대를 설득하는 근거로 자리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부패한 악의 무리 때문일까? 이와 관련해 OCN 드라마 <WATCHER> (2019)는 앞서 제시한 수사물의 전제를 뒤집는다. 작품은 만약 국가가 범죄를 조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여기서 국가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범죄를 생산하고 그것을 증식시키는 장치이다.



  과거 TVN 드라마 <비밀의 숲> (2017)이 살인사건을 계기로 은폐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힘의 카르텔을 목격하는 것에 도달한다면, OCN 드라마 <WATCHER>는 국가라는 시스템 그 자체를 지배하는 힘의 카르텔이 어떻게 유동적으로 범죄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삼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 속에서 드라마 <WATCHER>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국가 장치는 지배계급에 의해 완전히 장악 당했다는 암울함이다.  


  드라마는 ‘경찰을 떠나면 나중에 장사나 해먹고 살자.’는 뜻에서 만든 경찰 내부의 사조직이 증식해 국가 권력 기관을 장악한 상황을 설정하고, 장악된 권력 조직이 어떻게 연쇄살인 발생시키며 개인의 가족을 불행으로 몰아넣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서 사건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조직의 권력을 분할하기 위한 거래의 대상이 된다. 즉 사건의 증거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 조직의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부분이 쟁점이다. 사건의 해결이란 조직의 리스크 관리이며 관계자들의 이해에 따라 거래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거래라는 상품 교환의 경제적 원리이다.  


  그럼 OCN 드라마 <WATCHER>를 이끌어가는 긴장은 어디에서 오는가? 작품의 긴장은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 사이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누가 범인인가라는 의심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범인이라고 믿음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오류에 빠진다. ‘A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이 ‘A가 범인이다.’라는 확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의 지성은 주어진 정보들을 토대로  ‘A가 범인이다.’는 확신을 증명하는 논리를 구성하게 되고 가설은 명증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오류를 범하게 되는 원리이며 인간은 얼마든지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예컨대 작품에서 십오 년 전 아파트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김영군이 도치광 반장과 연쇄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면서부터 사건의 진실은 미궁에 빠진다. 김영군이 자신과 연루된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진실에 근접해갈 때마다 그의 기억 속 범인의 얼굴이 변화해간다. 김영군의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은 그가 과거 증언한 데로 아버지인가, 아니면 도치광 반장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제3자인가? 바로 이러한 장면의 전환은 인간의 기억과 믿음이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기억이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수많은 정보 중에서 일부의 정보를 편취해 사실을 구성한다.



  드라마는 김영군의 관점에서 인간의 기억이란 불완전하며 어디까지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지 않고 사건을 관찰하는 자세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손쉬운 판단을 중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판단중지를 통해 대상에 대한 거짓된 믿음을 향한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서 우리는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획득한다. 작품 속에서 도치광이 김영군에게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믿는 순간 실수하게 된다고 경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인간은 오류를 범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 김영군이 오류에 빠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자기 기억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잘못을 바로 잡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는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 사이를 오가며 명증한 증거 앞에서 누군가를 범인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있냐며 시청자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도록 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김영군이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길의 끝에 검찰과 경찰이라는 국가 기관을 장악한 장사회라는 조직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드라마의 물음은 뒤바뀐다. “누가 김영군의 부모를 살해한 범인인가?”에서 “장사회라는 조직의 정체란 무엇인가?”로 변모한다. 이때 드라마는 장사회의 조직원의 명부가 적힌 장부를 둘러싼 무리들 간의 거래와 범죄가 일어난다.


  드라마는 자신을 ‘나쁜 형사 잡는 형사’라고 자처했던 세양경찰서 감찰반장 도치광이 경찰조직을 장악한 장사회를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결말난다. 장사회의 간부이자 사건의 배후인 세양경찰서 차장 박진우의 죽음으로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결말에 범인 박진우의 살해를 지시한 인물이 경찰청장인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도치광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용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경찰청장과 거래를 시도한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는 도치광이 보여준 선택의 한계를 통해 다시 문제의 제자리로 돌아온다. 도치광이 말한 정의는 시스템이 허락하는 리스크까지일 뿐이다. 드라마는 애초에 정의를 묻지 않았다. 처음부터 시스템을 지배하는 것은 사건의 거래이다. 사건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며 범죄의 배후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범죄는 현재진행형이며 언제나 반복될 것이다. 도치광과 김영군이 은폐된 사건의 진실을 쫓았지만 그들이 목격하는 것은 이러저런 이유로 스스로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부정성이다.  과연 저들이 처한 현실과 우리의 처지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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