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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Dec 20. 2018

공포의 헤겔 극장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 (2017)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다중인격을 지닌 한 남성이 세 소녀를 납치하고 감금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왜 그가 소녀들을 감금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밀실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여주인공의 고군분투기를 다룬다. 어쩌면 흔할 수 있는 소재이지만 이 작품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분열된 자아들이 맺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평범하게만 보이는 케빈이 세 소녀를 납치한 이유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영화에서 세 소녀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납치되어야만 했다. 무슨 뜻인가? 영화는 납치의 이유를 숨은 24번째 인격의 명령이었다고 간단히 설명한다. 뭐라고? 이런 황당한 답변이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관객의 입장에서 납득하기 힘든 불친절한 답변이다.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그녀들이 납치된 진짜 이유는 바로 감독에게 24번째 인격의 탄생을 관찰하고 목격할 사람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까지 납치된 클레어가 케빈에 의해 살해되지 않은 진짜 이유다. 그녀는 사건의 목격자이자 24번째 인격의 존재를 증언할 증거다. 이것은 클레어가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답변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혹자들의 평가처럼 클레어를 기능적으로 소비하고 있지 않다.

  케빈이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유년 시절의 학대 경험과 현실 적응의 실패가 불러온 방어기제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클레어 또한 케빈과 유사한 학대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관계한다. 차이가 있다면 케빈이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 정신분열을 택했다면, 클레어는 현실과 적당한 타협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클레어의 억압된 과거 기억은 케빈을 마주함으로써 다시 반복되어 회귀한다. 즉 클레어가 애써 부정하고 있던 과거 기억이 되돌아오면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대결하기를 요구받는다.

  클레어와 케빈이 대결하는 장소 그러니까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 도심 지하인 것도 클레어의 표면 의식 아래 숨어있는 무의식의 장소를 표현하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클레어를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면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분열증을 앓고 있는 살인마의 탄생기가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주체를 어떻게 히스테리화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히스테리란 현실과 주체 사이에 봉합되어 있는 관계의 불일치를 표현하는 신경증으로 예술 작품에서 주체가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저항의 단초로 작동한다.   

  영화에서 클레어는 감금된 밀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케빈의 인격들을 이용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케빈의 인격들을 접하고 자신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설득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24번째 인격을 두려워한다. 그렇게 케빈이라는 남자의 다중인격들이 클레어의 시점에서 부각되고 그녀가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그의 분열된 인격들의 조화가 깨짐으로써 24번째 인격의 탄생할 조건이 성립된다. 그러한 가운데 영화는 인격들의 변화와 신체의 관계에 관해 전제를 달아둔다.

  케빈이라는 신체는 어떠한 관념이 주어지는가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관념이 물질에 더해지는가에 따라 사물의 형상과 속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의 테이블 위에 있는 컵을 상상해보라. 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분명 누군가 컵을 만들기 위해 진흙을 가지고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모양(형상)에 따라 컵을 빚어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컵이라는 사물은 진흙(질료)과 제작자의 관념적 구상(형상)의 합이다. 바로 질료형상이론이다. 질료는 관념의 형상과 합해져 사물의 존재를 구성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23개의 주체는 케빈의 신체를 경유할 때마다 그들의 표현으로는 무의식의 의자를 바꿔 앉을 때마다 신체는 변화한다. 신체에 부여되는 인격에 따라 신체 능력이 변화한다는 사유는 마지막 24번째 인격이 정체를 드러내는 시퀀스에서 절정을 이룬다. 영화는 신체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라고 전제하며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사유의 논리는 관념론적이며 주체의 관념에 따라 물질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기 쉽다.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것인가는 차치하고 영화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24번째 인격인 비스트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현실 적응에 실패한 케빈을 보호하기 위해 분열되었던 인격들은 다시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고 자기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비스트라는 초인격체를 창조했다. 케빈의 신체 변화를 통해 시각화되고 있는 정신현상은 분할된 개인들의 자유를 확장하고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국가라는 절대정신의 필요성을 정당화한 헤겔 철학의 논리를 물질화 한다. 이것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이 케빈과 클레어를 오가며 주체와 세계 사이의 변증법적 통합 과정을 다루고 어떻게 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시된 논리는 납득 가능하다.

  영화에서 비스트는 케인 내부에서 분할된 23개의 인격을 초월한 초인격체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에 걸맞게 엄청난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심지어 클레어가 쏜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다. 이로써 영화는 스릴러의 문법으로부터 이탈한다. 클레어가 감금된 방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긴장에서 시작했으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초월적 정신을 지닌 존재의 탄생을 목도하게 한다. 작품에서 24번째 인격이 비스트로 불리는 것은 다시 말해 ‘짐승’인 이유는 기성 현실 세계의 논리로 더 이상 억압할 수 없는 유령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니까 우리 의식의 차원이 매끈하고 지속되는 일상 속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무의식의 차원의 억압을 전제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다양한 형태로 회귀한다. 유령의 형상으로 혹은 괴물의 형상으로 변주되어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우리의 의식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체의 현실 적응이라는 문제가 사실은 주체를 기성 사회에 종속시키고 억압하는 논리임을 드러낸다. 문제는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에 대한 결속을 분리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체계의 바깥으로 이탈시키는 방법을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짜 문제는 현실에 적응하기가 아니라 반대로 저항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케빈과 클레어가 현실에서 고통 받는 원인이 무엇이었나? 바로 억압적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응이란 다시 말하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주체의 세계에 대한 불신과 의문은 삭제된다. 사회는 주체에게 체계를 위해 기능하는 존재이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기성의 사회 체제는 항상 정의롭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 억압적 사회 체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힘을 생산하여야 한다.   

  비스트는 부패한 현실 사회의 논리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악마’의 형상을 취한다. 그로 인해 기성 사회의 매끈한 상징적 현실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이 폭로된다. 비스트는 현실 사회의 봉합된 균열 지점을 횡단하며 저항의 장소를 점유한다. 다만 영화는 인간의 신념이 물질과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과연 분할된 개인들의 통합된 의지가 물질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다른 방식의 공포를  다시 생산하는 일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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