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Oct 09. 2019

 계급 분할의 세대론적 전망

-연출 조웅, 황승기 극본 정찬미 KBS 드라마 <저스티스> (2019)

 KBS 드라마 <저스티스> (2019)는 계급상승의 욕망을 가진 두 남자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계급성과 부정성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한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해 삶의 태도에 있어서 전향해야만 했던 과정을 추적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송우용 회장이 노동운동가 출신의 기업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는 학교 폭력에 의해 아들이 다리를 절게 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대의가 자본과 권력을 지닌 지배계급 앞에서 무력하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무자비한 권력은 아들의 장애를 막지 못한 아비로서의 무력을 확인시켜주었고, 그는 이때부터 권력자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한편으로 강한 권력 욕망을 가지게 된다.

  드라마에서 과거 송우용이 처했던 불합리한 현실은 노동자라는 신분이 지닌 계급성의 취약성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현실은 그가 노동운동가로서 자신의 대의를 포기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상황에서 사회적 정의가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계급적 구분에 따라 작동한다면 불합리한 상황에 송우용이 분노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사건은 그가 자본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며 계급적 차별과 자본주의적 사회 체계의 불합리성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버지의 계급이 아들의 계급을 결정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계급이 아들 세대에 대물림됨으로써 사회는 계급의 분할을 유지하고 사회적 차별의 정당성을 만들어낸다. 노동자 계급의 무력이 아들에게 대물림된다는 사회적 현실이 신체의 훼손이라는 은유를 통해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드라마 <저스티스>가 한국 사회를 세대론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70-80년대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권위적인 정부에 맞서 저항했던 당시의 청년 세대들이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었다는 현실의 모순이 송우용의 개인사와 겹쳐져 나타난다.

  드라마 <저스티스>가 기존 드라마들과 구분되는 점은 괴물이 되고자 했으나 실패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이태경을 중심으로 권력자들의 은폐된 부정을 추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면 기타 작품들과 차별성을 보여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작품이 지닌 입체성은 송우용이란 인물을 둘러싼 개인사와 그의 성격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적자로 살아남겠다고 다짐한 송우용이 자신을 추적해오는 이태경을 제거하지 않고 망설이는 모습은 선량하게 보이는 청년 사업가 탁수호가 자본의 힘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괴물이었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드라마는 송우용이 자신의 범죄를 아들에게 고백하고 자살하는 것으로 결말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송우용은 아들 송대진이 자신의 말을 녹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죄를 고백한다.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부정에 대한 책임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들 송대진이 과거의 부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청년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송우용이 송대진에게 시계를 선물하며 ‘항상 처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장면을 통해서 강화된다. 이 장면은 부정한 과거의 유산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는 것에 대한 반대와 그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청년 세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기대는 다음 후속 세대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아닐까? 송우용의 유산을 상속받은 송대진이 사회적 기업을 설립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자본의 체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의 개혁과 변화에 한정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드라마 <저스티스>는 결말에 이르러 슬픔에 젖은 이태경이 길에서 죽은 송우용을 조우하는 장면을 삽입하고 있다. 필자의 관점에서 이 장면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 세대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정한 과거라고 할지라도 현재는 어디까지나 과거에 근거해서 성립한다. 과거의 부정과 단절하되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처했던 삶의 조건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 조건 위에서 한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평가할 때 진정 우리는 다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반성과 책임의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태경이 사건이 시작했던 장소로 돌아와 죽은 송우용의 환영을 마주하는 장면은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을 마주한 역사의 반복과 교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