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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Oct 09. 2019

불안과 신경증의 세계

-연출 이창희, 극본 정이도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2019)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작품은 웹툰의 과장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주인공 종우가 사회와 부딪히며 겪게 되는 불안한 내면 심리를 다룬다. 실제 지방의 젊은 청년들이 처음 서울에 상경해 저렴한 가격에 거주하는 공간이 고시원이라는 점에 이 작품의 설정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고시원의 좁은 공간과 그로 인해 타인에게 사생활이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환경은 종우의 신경증적인 성격과 잘 어울린다.

종우의 신경증은 작품의 초반부터 군대 경험과 오버랩되어 트라우마로 다루어진다. 군대 후임이 선임에게 불합리한 폭력을 당하고 있음에도 침묵해야 했던 경험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이후 종우는 타인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종우는 지속적으로 고시원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대하는 고시원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작품은 종우의 관점에서 그의 불안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기 위해 고시원이라는 공간을 그로테스크하게 연출하며 동시에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비정상적 성격을 강조한다.  하지만 종우의 억눌러왔던 신경증이 외면적으로 폭발하는 순간은 일상생활 속에서이다. 사장이라는 이유로 권위적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는 선배와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직장동료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당하지만 제대로 항의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때마다 타자에 대한 그의 살의는 커져만 간다. 이러한 종우에게 자기 내면의 본능적인 폭력에의 욕망에 눈을 뜨라고 가르치는 것은 같은 고시원에 사는 치과의사 문조이다. 그는 고시원 살인마들의 수장으로 종우에게 살인의 욕망을 천천히 인식시키며 그의 정체성을 변화하도록 유도한다.   

종우는 일상생활에서 합리적 의사 표현이 권위적인 방식에 의해 무시될 때마다 그의 억압된 폭력에의 욕구는 커지며 문조의 도움으로 자신의 폭력성을 인식해 나간다. 종우는 자기 내부에 분열된 본능적인 폭력의 욕망과 합리적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과적으로 고시원에 사는 살인마들을 처단한다. 종우가 억압했던 폭력의 욕망을 해방하고 살인마가 되는 것은 문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종우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종우는 자신을 억압하는 타자 그리고 그들의 집합인 사회에 지쳐버렸고 이성을 버리고 살인마가 되는 것을 택한 것이다.  드라마의 반전은 살인마 문조가 종우의 다른 자아임이 밝혀지며 끝난다. 이 작품은 앞서 말했듯 종우의 불안과 광기의 근원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종우의 다른 자아인 문조는 지속해서 폭력이란 내면의 본성이라고 설명하지만 실상 종우가 경험한 폭력은 사회적 관계의 내부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을 억압하는 타자를 살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던가. 이런 맥락에서 종우의 광기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저 순진한 청년을 극한의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정신병을 앓는 살인마로 만든 것일까? 이 문제에 집중할 때 작품의 의미는 생산적이다.

우리는 동시에 이 작품의 연출이 보여준 고어(gore)적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고어란 잔혹한 살육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미학적 관점을 말한다. 예컨대 작품에서 인육을 썰거나 먹고 도끼로 사람의 머리를 찍어내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폭력의 미학은 단순한 가학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아무런 근거 없이 내재한 ‘인간’이라는 관념의 근본적인 우월성을 의심하도록 하는 장치이다. 이것은 마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와 인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씨네 21>의 기사에서 박찬욱의 영화 <스토커> (2013)를 논평하며 살인이란 성장의 은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그의 말처럼 살인은 타자의 살해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살해를 포함한다. 종우의 살인은 타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향한 것이기에 미학적으로 잠재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가능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종우는 마지막까지 살인마가 된 자신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원인 모를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종우는 타자라는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타자의 타자’가 되는 방법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그는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고 수용한 것일까? 필자는 두 가지 가설 모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종우가 광기에 사로잡혀 미쳐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오히려 종우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자기 소외에 빠진 광인은 아닐까?  이 작품은 결말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 (1980)의 한 장면을 오마주하고 있다. 영화 <샤이닝>은 미국의 백인 남성들이 인디언들에게 가했던 역사적 폭력의 기억이 공포물의 형식으로 재구성된 작품으로 잭이라는 백인 남자가 고립된 호텔에서 원인 모를 공포 속에서 미쳐버리고 자기 가족을 살해하고자 하지만 실패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드라마에서 종우가 보여주는 살인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한국의 역사적이고 우월적인 남성적 세계의 폭력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 작품은 그 폭력의 세계 내부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필자는 감독의 연출과 접근을 긍정적으로 보지만 작품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우는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비겁했고 책임을 외부로 돌렸다. 그는 얼마나 자기 자신과 타자에게 솔직했고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종우의 운명이 타자와 사회의 구조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필자는 작품이 보여주는 폭력에 동의하지 않으며 폭력의 원인을 보편화하고 일반화된 세계로 환원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런 방식은 인간을 사회적 구조의 산물로 환원하고 세계의 가능성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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