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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r 29. 2020

사랑과 오인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영화 <클로저> (2005)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영화 <클로저> (2005)를 대학시절에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의 욕망과 사랑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가해한 욕망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두 쌍의 커플을 보며 저들은 왜 저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냐는 생각만 했다.
15년이 지나고서야 나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의 연인들이 사랑했던 것은 상대가 아닌 그 너머에 있는 세계였다는 것을 말이다.
저 사랑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고통 속에 휩싸인 연인들은 서로의 뒤에 있는 실재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로의 연인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들이 만든 환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앨리스가 댄에게 만질 수도 혹은 볼 수도 없는 사랑을 증명해보라고 말할 때 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 이유는 앨리스가 말하고 있는 사랑을 댄은 어디에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말하는 사랑은 그녀의 환상 속에 있을 뿐 댄은 그것을 돌려줄 수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돌려받지 못하고, 동시에 상대가 나에게 그것을 돌려주지 못할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양가감정 속에서 서로를 증오하며 고통받게 되는 것이다.
처음의 사랑이 서로를 향한 증오로 돌변할 때, 주체 내면의 리비도는 상대를 포기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거나 그 힘이 소진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연인을 잃은 남녀가 육체의 희열을 발산시키는 가학적인 성행위를 통해 그 증오와 슬픔의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들은 사실상 그런 방식으로 서로의 연인과 뜨거운 이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 속의 성관계는 서로를 탐닉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했던 연인에게 들러붙은 리비도를 소진시키기 위해 자기 육체의 희열을 발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회귀적인 것이며 남녀 사이의 ‘성관계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사랑의 작동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오인의 구조이며 자기회귀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예컨대 시인 정현종은 <섬>이란 시에서 도달할 수 없지만 끝없이 욕망되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히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 / 그곳에 가고 싶다”라고 말이다.

시는 삶의 비의를 한 구절에 담는 절묘함이 있다. 구구절절한 평론이란 이럴 때 언어의 낭비이며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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