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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Aug 08. 2020

존재를 초월하는 경험에 관하여

-이장욱의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2016)

  1. 미열들의 강도 


  마르셀 프루스트는 작품이란 일종의 모국어 내 외국어로서 쓰인다고 말했다. 무릇 예술 작품이란 언어 내에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작업임을 뜻한다. 즉 예술이란 변화와 파괴를 동반한 생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글쓰기가 의도된 실패의 향유에 머문다고 비판한다. 작가들이 언어의 소통불가능성을 증식시키는 것에 머물고 만족한다는 것이다. 

  정녕 그러한가? 한 예로 극작가이자 소설가였던 베케트가 자신의 언어를 소진시키는 감산적 운동 속에 언어의 바깥을 드러내고자 했던 시도는 순수 사건으로서 시간-이미지와 조우하고자 했던 극한의 예술 작업이었다. 베케트는 언어에 스스로 구멍을 내어 재현적 반복의 가능성을 소진함으로써 작품의 유기적 구성을 해체하고 비인칭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이것은 자신의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모두 소진함으로써 사유하기를 강요당하는 경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월경(越境)의 시도이다.    

  언어 내에 새로운 언어를 증식시키는 방식은 작가마다 다르다. 언어에 질병을 퍼트림으로써 고유의 언어를 생산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문제는 자폐적인 증상으로써 언어적 의사소통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언어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며 미감의 차이를 획일화하는 것이다. 우리 감각의 순수한 차이를 지성의 범주 아래 하나의 원리로 동일화하는 방식이다. 질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문학은 의미가 아니라 기능하는 것이며, 주목해야 할 것은 언어의 감산 운동을 발생시키는 텍스트의 내재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내재성이란 초월적 관념을 배제하고 자기 경험의 평면 위에서 사물의 내적 역능을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 경험 조건에 내재하지만 아직 사유되지 않은 잠재적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재적으로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선재적인 사유이미지를 해체하고 대상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자기-변별적인 차이들에 주목하는 작업이다. 바로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힘의 발생 조건 그리고 각각의 힘들의 관계와 변형을 살피는 일이다. 선언어적인 초월의 관념을 가지고 부분을 전체와의 유비 속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들의 관계와 운동이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장욱의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2016)에 실린 시편들은 우리의 경험 현상에 내재하는 힘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시각 현상의 표면 아래 깊이로 하강하여 대상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기를 요구한다. 즉 언어의 바깥을 향하는 재현적 언어의 감산 운동의 벡터를 형성한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얼음처럼」부분


오늘 아침에는 세상의 창밖들을 모두 이어져서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 나에게는 

아침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놀라운 초원이 보인다.

                                      -「아침들의 연결」부분


  우리의 일상은 정오의 태양처럼 완료된 의식 세계, 시간이 흘러서 계절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무가 꽃을 피우는 인과율의 세계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직관에 의해 파악된 대상을 인과적 질서로 구성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지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규칙화되어 이해되기 때문에 어떠한 불균형이나 공백도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인과율의 세계를 거부한다. 그가 말하는 세계는 계절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무가 꽃을 피우는 세계가 아니라 “뜻밖의 계절”이 나무에 의해 표현되는 장소이다. 나무가 꽃을 피우는 내적 역량이 계절로 은유되는 ‘시간’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시인의 내재성에 대한 이해는 점토가 벽돌이 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점토가 벽돌로 되는 이유는 외부의 압력이 원료에 가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토가 벽돌이 되기 위해서는 외부의 압력을 받아들이는 수용력과 점토 그 자체가 내부를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힘만이 아니라 사물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잠재적 역량이 발현되지 않으면 어떠한 창조적 변형이나 생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계절이란 나무가 지닌 역량이 자기를 발현하는 순간과 시간의 흐름이 동시에 접혀들어야 현실화되는 기호이다. 

  그럼 시인이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플라톤적인 의미의 영원이란 우리에게 세계가 생성된 원리의 당위를 강조한다. 그의 철학에서 사물의 본질은 선재하는 본유 관념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플라톤은 수많은 개체들 속에서 동일한 형상 하나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사유에는 차이를 위한 공간이 없다. 창조는 어디까지나 생성을 뜻한다. 그리고 생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차이를 통해서 이다. 반복은 차이를 동반한 반복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반복은 선재하는 것의 재인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생성이란 창조적 사유가 끼어들 수 없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새로운 아침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세계가 동일한 것을 재인하는 영원성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시인이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아침의 가능성’은 무수한 아침들의 연결과 접속을 통해 초원의 세계를 생성해 나간다. 분할된 ‘아침’들은 동등한 평면 위에서 구조적 계열을 구성하며 연결되고 변별적 차이를 드러내며 지속한다. 그렇게 분할된 아침들은 보이지 않는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분할된 다양체들이 자신의 아침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접속의 세계를 시인은 ‘초원’이라 표현한다. 


신문사에서 편지를 쓰고 매일 실망을 했다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에테르로 변하는 세계를 사랑하였다.

강물이 무너지고

돌이 흘러갈 때까지 

                                               -「필연」부분 


  ‘초원’이라는 시어가 암시하듯 자유롭게 연결되고 흐르는 유목의 삶을 꿈꾸던 시인은 “고체가 액체로 / 액체가 에테르로 변하는 세계를 사랑하였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기성의 질서를 대변하는 고체의 세계가 아니라 무한히 전개되는 펼침의 가능성을 지닌 액체의 세계를 사랑한다. 액체의 세계는 무한의 역량이 수축된 잠재적 장소를 의미한다. 이처럼 무한히 변화하고 운동하는 가능성의 잠재적 세계를 상상하는 시인이 액체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에테르라는 가상의 매질로 가득한 변형과 생성의 세계를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것 같다고 말하는 일은 이제 충분히 납득 가능해진다.  



  2. 인식의 표면을 초월하는 경험


  시인의 시적 대상들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부유한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지적에는 시인의 시세계가 현실과 환상을 횡단하면서 해체적 언어의 놀이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시인의 세계에서 정작 중요한 점은 현실화되지 않은 존재들이 실재의 위상을 지니고 작동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횡단하는 표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리 경험에 내재하는 존재적 조건에 대한 형상화의 깊이를 살펴야 한다.  


나타나지 않은 개와 싸울 수 없었다. 

귀를 물어뜯고 피를 흘리고 아가리를 찢고

존재의 끝까지 

아주 단순한 마음이 될 때 까지 

그것은 불멸의 개였다. 

옆집의 개였다. 

개가 아니었다가 

거의 진정한 개가 되어서 

막다른 골목에서 커다란 개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은 개가 내 목을 물고 

나타나지 않은 개가 꼬리를 치고

나는 골목의 어둠 속에 서서 

바로 그 개를 바라보았다. 

아주 단순한 눈으로 

                                       -「불멸의 개」부분


  우선 시인이 위의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개’의 존재적 성격에 주목하자. 이때 개라는 존재의 성격이 이중적이라는 점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나타나지 않은 개가 목을 물고 / 나타나지 않은 개가 꼬리를 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적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납득할 수 없다. 나타나지 않은 개는 사람의 목을 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개가 목을 무는 경험,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꼬리를 치고 있는 개를 사실적으로 느끼고 있다. 나타나지 않은 개를 마주하는 경험이 결코 환상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개를 바라보았다. / 아주 단순한 눈으로”라는 구절이다. 시인은 ‘개’가 환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단순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사실로 적시한다. 

  즉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개’의 존재적 성격은 현실화되지 않지만 분명히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다. 골목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개가 출현하는 경험은 누구나 겪어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나 경험하는 사건이라고 언제나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개의 출현이라는 사건은 현실화되기 이전까지 골목길이라는 공간이 지닌 잠재성으로 내재한다. 

  우리는 경험을 신체적 차원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석의 자기장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작용하는 것처럼 경험이란 신체의 이미지에 한정할 수 없다. 예컨대 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신체마저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장기들의 배치와 기능들의 배분에 따라 활동한다. 신체를 범주로 의식화된 경험은 ‘경험’ 그 자체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 경험은 신체의 사유이미지를 넘어서는 영역에 실재한다. 

  시인이 진술하고 있는 나타나지 않은 개가 내 목을 물거나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경험들은 습관적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 주체의 외부를 지시한다. 관념적 인식과 경험의 불일치는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지성의 무능력 그리고 주체의 의식적 차원의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의 외부를 드러낸다. 관념과 경험의 불일치는 일종의 미적 체험으로서 대상의 형식과 미적 관념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사유의 일치의 강박에서 벗어나 오히려 새로운 사유의 방법을 창조해야 하는 생성의 원인이자 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이 작품에서 표현하는 불일치의 경험은 일상적 차원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 가능의 조건’으로 내재적 차원에 놓인다. 즉 시인은 경험 이전에 ‘경험 가능의 조건’으로써 초월론적 경험의 장(場)을 작품 속에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 개라는 존재가 불멸인 것은 당연하다. 골목길에서 개를 마주치는 경험의 현실화는 ‘경험 가능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내재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개는 일종의 환상이 아니라 경험에 내재하는 경험의 조건으로 실재의 차원을 드러낸다. 이러한 초월론적 경험의 세계는 일상적으로 신발을 신거나 밤에 혼자 서 있는 전봇대의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손가락을 신발 뒤축에 넣어 잘 신고

발끝을 탁탁 바닥에 부딪쳐도 보고

잘 신었구나, 

생각하는 것인데 

아직 신발 속에 무엇이 있다. 

자꾸 커지는 무엇이. 

나와 함께 이동하는 

내가 아닌 

전 세계를 콕콕 

찌르는

                -「신발을 신는 일」부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저녁 무렵에 가만히 내어다본다

숨어 있던 사람이 아직도 숨어 있는 

적막한 골목을. 

거대한 머리통이 아직도 자라고 있는 

밤의 전봇대 쪽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전봇대 뒤의 세계」부분 


  시인은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는 신체의 경험적 의식을 자꾸 벗어나는 낯선 감각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발끝까지 부딪쳐보지만 신발 속에 아직도 무엇인가 이물감이 느껴지고 심지어 자꾸 커지는 무엇이 존재한다. 지성적 언어로 의미를 고정화시킬 수 없는, 지성을 초월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알 수 없는 존재가 “전 세계를 콕콕” 찌른다. 이때 찔리는 경험은 어떤 대상이 자신의 존재를 매개 없이 시인의 신체 감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사건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시인이 신발 속에서 느끼는 이물감은 일종의 정신착란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대상을 상징화할 수 없는 경험은 분열증이란 질병으로 분류된다. 이 같은 분열의 경험은 기성의 질서로부터 탈주되는 무의식의 흐름을 표현하지만 현실 세계는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이 진술하고 있듯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신발 안의 존재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시인의 지각에 직접적으로 자기 존재를 각인한다. 분명히 감각되지만 지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세계 전체를 찌를 정도로 순수한 강도를 지니고 있다. 잠재된 세계가 지니고 있는 강도를 감각하던 시인의 눈은 전봇대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적막 속에서도 “숨어 있던 사람이 아직도 숨어 있는” 영역을 발견한다. 

  여기서 시인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잠재성의 깊이를 드러낸다. 즉 잠재성의 영역은 현실화의 가능성과 함께 비현실화의 가능성조차도 포함하는 깊이를 지닌다. 예를 들면 운동이 가속 운동만이 아니라 정지 운동까지 포괄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시인이 말하는 전봇대의 세계는 운동의 수축 양태를 표현한다. 이처럼 시인은 의식적 경험을 초월하는 경험의 가능 조건으로써 아직 사유되지 않은 다시 말하면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 세계를 작품 속에서 펼쳐나간다. 



  3.  주체라는 빈 공간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사고에서 의식적인 주체란 확실성의 대상이 아니라 임시적이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대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샌드페인팅」이란 작품을 살펴보면 그가 생각하는 주체의 형상은 모래와 같은 미립자들이 이질성을 생성하며 무한히 흩뿌려지고 분열하는 공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중략…

어디 안 보이는 곳에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다.

                     -「샌드페인팅」부분 


  실제 모래의 질료적 속성이 한 곳에 뭉치지 못하고 각각의 모나드와 같이 분리되어 있음은 모두가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이다. 작품에서 모래는 일종의 모나드에 대한 비유로 보이는데 각각 독립되면서도 상호 연결된 관계들이 주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자기 전개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샌드페인팅」에서 시인이 지각하는 세계는 주체의 확실성이 사라지고, 나를 생각하는 타자를 통해서 현존한다. 시인에게 ‘나’라는 존재는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는” 곳에 있다. 나와 주체의 동일성이 해체되고 나란 존재는 「샌드페인팅」이라는 제목처럼 임시적이고 우연적 모래의 형상으로 남는다. 주체의 확실성이 의심되면서 견고하던 지성의 세계는 유동적인 변형의 공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일상적 ‘표면’의 세계에서 ‘깊이’의 세계로 하강하는데, 그곳은 욕망 이전에 존재하는 충동의 세계이다. 


커다란 양은그릇에 담겨 있는 소시지와 나물과 흰밥이 하나의

동일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내가 개를 부르지 않고 개가 나를 향해 짓지 않고 나는 개의 기다란 혓바닥이 되고 개는 나를 호흡하는 

이토록 긴 영원 속에서 

대격전 속에서 

우리는 전 세계에 너그러워질 것이다. 

무섭게 너그러워질 것이다.

-「이제 바닥에 긴 몸을 붙이로 잠을 자려는 욕망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개에 대하여」 부분


  “내가 개를 부르지 않고 개나 나를 향해 짖지 않고 나는 개의 기다린 혓바닥이 되고 개는 나를 호흡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개가 나를 꿈꾸고 있는지, 내가 꿈꾸는 개인지 굳이 구별하지 않는다. 개와 인간이라는 존재가 뒤섞여 변형되고 새로운 종이 생성되는 창조의 공간이며, “커다란 양은그릇에 담겨 있는 소시지와 나물과 흰 밥이 하나의 / 동일한 /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가는 세계”이다. 시인은 음식 혹은 먹거리라는 이름으로 동일화되지 않는 차이의 세계를 발견한다. 이 세계에서 시인은 “무섭게 너그러워”진다. 각각의 존재들이 자신의 차이를 상실하지 않고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는 배려의 세계이다. 종의 구분 사라지고 개와 인간이 뒤섞이는 변형과 생성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이쯤에서 망각되었지만 분명 존재했던 신화적 기원의 순간이 떠오른다. 예컨대 이집트의 신화에서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신이 뒤섞여 만들어내던 변형과 생성의 순간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가진 신들이 등장하고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이란 형상, 그리고 종의 구분이 사라진 ‘동물의 인간-되기, 인간의 동물-되기’라는 기이한 시간이 작품 속에 출현한다. 지성적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무의식의 내적 흐름은 나와 타자의 불온한 뒤섞임과 혼란한 이미지들을 생산하며 지성적 질서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나는 조금씩 키가 자라고 

길어진 목으로 출근을 하고 

서서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해 지는 강변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당신이 나를 꺼냅니다.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초원에서 

내가 아닌 모든 것과 

나의 

명백한 사이에서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사이에서」부분 


  그리고 드디어 시인은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사이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공백을 발견한다. 이때 ‘공백’ 또는 ‘빈 공간’ 혹은 ‘사이’라는 어떤 표현이 되었던 그 함의는 초월적인 장소성을 환기한다. 상징화가 불가능한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남겨지는 지점이다.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장소의 발견이 “내가 아닌 모든 것과 나의 명백한 사이”에서 믿을 수 없는 ‘세계’나 ‘초원’의 생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시인이 말하듯 “나는 조금씩 키가 자라고 / 길어진 목으로 출근을 하고 / 서서 낮을 자고 저녁에는 / 해 지는 강변에 가만히 서” 있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나(A)와 나 아닌 것(A')으로 전체화하거나 동일화할 수 없는 어떤 힘의 침범을 ‘세계’와 ‘초원’의 발견이라는 경험으로 고백한다.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를 (A)와 (A')로 나누기 위해서는 “세계는 하나의 동일한 전체이다.”라는 전제 조건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A)와 (A')사이에 ‘A’라는 동일성이 전제로 요구된다. 이러한 전체의 동일성 속에서만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은 표면적으로 차이를 표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전에 ‘나’의 동일성을 전제로 조직된 세계이다. 

  오히려 시인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공백을 열어두었을 때 낯선 세계와 초원이 생성되는 경험을 한다. ‘나’와 ‘나 아닌 것’에 포함되지 않은 세계와 초원은 결국 나의 경험을 초월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을 표현한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견고한 동일성을 부정하는 이질적 타자의 드러남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4. 사유의 발생과 무엇-되기  


  이장욱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은 사물의 내재성을 미시적 감각하고 포획하는 힘이다. 이것은 사물들의 내재성을 정지된 눈으로 녹여내어 응시하는 일이며 사물 그 자체의 고유성을 왜곡하지 않고 수용하는 역능이다. 즉 힘의 직관적 수용이다. 이 같은 내재성에 대한 이해는 경험을 초월하는 경험의 잠재성에 대한 긍정을 보여준다. 잠재성의 세계는 단순히 사물들의 관찰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체를 인간학적 실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되기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로 자리하도록 한다. 

  예컨대 앞서 논했듯 삶의 가능성은 시인의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것처럼 ‘불멸하는 개’ 혹은 ‘세계를 찌르는 존재’의 형상이 이해 불가능함에 도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즉 지성적 이해의 무능력이야 말로 사유 생성의 조건인 셈이다. 우리의 삶은 경험 가능의 세계 속에서 사유되지 못한 잠재적 세계를 내포하며, 고정된 기성의 질서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우리의 관념을 인간학적인 편견으로부터 해체하고, 비인간적 주체로서 무엇-되기의 과정을 통해 질서 내부에 특이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존재의 특이성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불가능의 영역을 마주하고 견고해 보이는 것들의 균열과 폐허를 더듬어야 한다. 그렇게 잠재적인 것들의 현실화 혹은 현실화된 것들의 잠재성은 언제나 보존되어야 한다. 결코 이것은 예술에 대한 신비화가 아니다. 신비화란 허구이지만 예술이란 지속해서 존재의 특이성을 생산하는 실재-공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영숙은 

마음을 읽고 싶지 않았다. 손님이라든가

내리는 눈의 마음을.

자기 자신을. 

단 한글자도.

그것이 영숙의 힘.

영숙의 옷가게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들이 있지만

색깔들은 배경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가 이해할 것인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배경이 되는 곳을.

생각이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을.

                     -「영숙의 독심술」부분 


  위의 작품에서 영숙은 사물의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과 사물의 마음을 읽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세계 그 자체에 자신을 열어둘 뿐이다. ‘손님’이나 ‘눈’ 그리고 ‘자기 자신’ 조차도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을 포함해 사물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무능력이 시인은 영숙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물과 배경을 연결하여 세계를 지성적으로 파악하기 마련이다. 마치 어떠한 배경에는 이러저러한 색깔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은 ‘나’라는 주체를 신체와의 일치로 이해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영숙의 옷가게는 색깔과 배경의 연결이 지닌 당위가 해체된 이해 불가능의 공간으로 묘사되며 “생각이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이 출현하는 곳이다. 역설적으로 영숙의 독심술은 대상의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에야 성공한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의미화가 실패하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타인과 사물의 세계가 지닌 고유성을 지성적 관념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감각되고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영숙의 독심술」은 ‘나’와 ‘세계’의 일치가 포기되는 순간 나와 사물의 세계가 나를 포함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난다. 즉 ‘나’라는 존재는 주체의 해체 과정에서 무엇-되기를 통해 새롭게 창조해야 할 대상이다. 


어느 날 나는 사례 깊은 여성이 되어서 

매니큐어를 칠했다

페디큐어까지

나는 한 번도 여성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외로워졌다.

…중략…

나는 거대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벌레가 되었다가 

무한한 계절들과 

생각할수록 무서운 대화가 되었다가 

              -「사려 깊은 여성들」부분 


  시인은 여성-되기를 비롯해 거대한 인간이 되기를 시도했다가 다시 벌레가 되기도 한다. 혹은 계절들과의 무서운 대화가 되어 흘러 다닌다. ‘나’라는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는 어떤 흐름이다. 이때 주체는 명석하고 판명한 존재가 아니라 변형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공백의 장소를 지시할 뿐이다. ‘나’라는 존재자는 장소적 형식의 내용으로 생산의 연쇄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우연한 사건의 출현이 된다. 이러한 무엇-되기라는 연쇄적 흐름은 의식적 주체의 동일성을 해체한다. 여기서 무엇-되기는 인간적 관점을 초월해 여성, 동물, 심지어 계절의 무서운 대화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뇌리에 관념적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주체는 무한의 흐름 속에서 비인간적 생성의 가능성이 잠재하는 장소로 대체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살아간다.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미시적인 변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 양태를 열어둔 상태로 살아간다. 또한 각각의 존재자들은 분명한 강도로 자신만의 분자적 삶의 방식을 창조한다. 스쳐가는 바람과 떨어지는 나뭇잎도 밤에 뜬 별들도, 모든 존재는 삶을 지속하는 동안 자기 혁명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존재는 문득 바라본 밤하늘의 어둠이거나 가로등 불빛에 가려진 사람들의 뒷모습 혹은 나의 손을 잡아주던 어떤 기적 같은 온기일 수도 있다. 예고 없이 의지를 벗어난 이미지는 황홀하다. 가상이 아닌 감각으로 실재하는 어떤 힘을 표현하는 이미지란 나의 지성을 초과하는 경험을 표현한다. 산다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어긋나고 알 수 없고 의지를 벗어나는 일. 

  나는 우리 삶의 경험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관해 생각한다. 그 존재는 공간이나 명료한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망각 속에서 나를 벗어나 나를 길러내는 존재들, 나의 내면에 과거라는 이름으로 축적된 무수한 시간들이 삶을 조직한다. 신체를 범주로 세계를 절취한 주체가 나와 세계를 구분한다. 나에게도 ‘나’는 낯선 생명이고 존재이며 타자이다. 현대의 주체는 나와 타자의 관계 사유하기라는 외피를 쓸지라도 그 본질은 나 자신과 관계 맺기라는 자기 배려의 윤리에 가닿는다. 복잡한 말보다 이런 문장이 더 아름다울 듯하다. 나는 어떻게 나를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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