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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Aug 10. 2020

폭력과 폐허의 세계에 머물기

-한강론

  1. 달의 몰락     


  그렇다. 그대는 아직도 나에게는 모든 무덤을 파헤치는 자다.

  건투를 빈다. 나의 의지여! 무덤이 있는 곳에서만 부활이 있는 법이다.    


  -니체, 「무덤의 노래」 中에서    


  한강의 소설들은 세계에 던져진 우리 삶의 추문(醜聞)들을 하나씩 모아서 잘 쌓아올린 건축물이다.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깊은 인간의 심연을 길어올리는 글쓰기의 매혹, 그렇지만 그가 보여주는 날 것의 이미지들은 위태롭고 추악하며, 너무도 강렬하게 독자의 마음을 할퀴어놓는다. 상처 입은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나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도, 타자를 나의 욕망에 가두어두는 일도 아니다. 문학의 윤리란 나와 타자 사이 어느 능선에서 발견되는 낯선 삶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평생 달의 한쪽 면만을 응시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밤하늘에 뜬 달을 완벽히 바라본 경험이 없다. 달의 뒷면은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에 의해 움푹 파이고 부서져 간다. 언젠가 실제로 달은 몰락할 것이다. 즉 달은 몰락을 등지고 발광(發光 혹은 發狂)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괴되는 것은 어둠만이 아니라 빛이기도 하다. 작가 한강에게 인간의 운명이란 몰락과 함께 발광하는 서늘한 달빛이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 발광(發狂)하는 인간을 응시하는 자의 표정은 어떨까? 왜 한강은 삶의 부정성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죽거나 혹은 살아남았더라도 세계의 부정성 속에 그대로 던져진다는 점에서 참혹하다. 한강은 삶에 관해 어떤 심심한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 현실의 냉혹함을 체험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성찰하도록 한다. 이때 삶은 죽거나 혹은 나쁜 것으로 이 고통스러운 실존적 상황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진다.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년)는 “인간이 침묵 속에서 괴로워할지라도 신은 슬픔을 말할 수 있는 선물을 내게 주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언급처럼 세계의 폐허에 던져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자신의 고통을 신에게 고백하는 것밖에 없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예술이란 세계의 폐허에 내던져진 존재자의 고통을 고백하는 무력의 아름다움이다. 예술은 가장 쓸모없기에 나와 타자가 공평하게 짊어진 무력의 슬픔을 누설하는 삶의 추문(醜聞)인지도 모른다.       


  

  2.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한강에게 삶이란 죽음을 동반한 막연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근거에 토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체험을 통해서 감각되는 성질의 것이다. 가령 이것은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어느 늦은 저녁」, 11면)생각하면서도, “밥을 먹어야지”(「어느 늦은 저녁」, 11면) 라고 생각하는 삶에 대한 막연한 지향성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검은 사슴』 (1998)에서 잘 나타난다.

  정신착란에 시달리다가 집을 가출한 의선의 흔적을 쫓는 과정에서 강원도 황곡까지 오게 된 인영과 명윤이 한 갱도에서 발견하는 것은 빛나는 뿔과 날카로운 이빨을 빼앗긴 채로 죽어가는 ‘검은 사슴’과 다름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아내를 찾기 위해 하데스의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그들은 의선을 만나기 위해 죽음의 갱도를 아슬아슬하게 밟아나간다. 모든 모험을 마치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기차의 차창 밖으로 하얀 눈이 내린다. 마치 인영과 명윤이 황곡에서 발견한 인간 내면의 누추함이 눈에 덮여 망각 되는 것만 같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타고 있던 기차가 선로를 이탈하고, 죽음은 폐허의 형상으로 하얀 표면을 뚫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명윤과 인영은 병원 치료를 받으며 “어찌 됐든 살아있다는 건 좋다.”(434면)라고 자각한다. 우리는 명윤과 인영의 자각을 통해 누추한 현실의 삶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지속을 향하는 힘을 발견한다.

  한강의 장편소설  『검은 사슴』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슬픈 사연이 있다. 주인공 인영은 친누나가 바다에서 익사했으며, 명윤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렸고, 황곡에서 만난 장종욱은 아내가 가출해버렸다. 저마다의 아픔을 지닌 인물들은 슬픔을 감추고 타자와 간격을 지키며 살아간다. 세계와 주체 사이의 간격은 나와 타자의 차이를 생산하는 구간이지만, 동시에 나와 타자를 분리하는 고독의 장소이다. 보이지 않는 간격에 투명한 유리 벽이 가로놓여있다. 그렇기에 명윤의 눈에 인영은 “세계의 논리에 무심한 사람”(123면)으로, 장종욱은 “마치 끊임없이 포효하고 있지만 무엇인가로 눈과 귀를 틀어막혀 자신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는”(133면) 짐승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강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자폐적임을 말해준다. 인간은 어떤 무늬인지 상상할 수 없는 간격을 삶이라 부르고 그곳에 숨어서 살아가는 검은 짐승들이다.

  한강은 두 번째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 (2002)을 통해 삶의 본질과 진실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질문한다. 이 작품에서는 예술가 장운형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세상의 표면과 본질적 관계에 집착한다. 그 이유는 우연한 계기에 ‘진실’이란 타자가 원하는 ‘진실’을 누설하는 순간 발생한다는 점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 중략 … 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대의 차가운 손』 (62면)  


  섬뜩하지만 장운형의 말처럼 진실은 타자가 인정하는 경우에만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 우리를 규정하는 본질 혹은 진실이란 타자의 인정을 통해 생산된다. 이것을 이렇게 고쳐볼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은 타자에게 욕망되기를 욕망한다.”라고 말이다. 작품 속에 라이프캐스팅 모델로 등장하는 L과 E라는 여성들은 타자에게 욕망되기를 욕망함으로써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소외시키는 인물들이다.

  L은 다이어트를 통해 체중을 감량함으로써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선망의 시선을 얻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E 또한 자신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절단함으로써 ‘육손이’라고 호명되었던 자신의 과거를 망각하고,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그들은 타자가 규정한 정상성의 기준에 의해 자기파괴를 해나간다. 하지만 이와 같은 폭력성은 그녀들의 차가운 손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새겨진다. 그들은 L의 고백처럼 자신을 “남의 눈에 비친 나 말구는 내가 없는”(265면.)것으로 체험한다.

  작품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E와 장운형이 전신 라이프캐스팅을 통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제의(祭儀)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끌로 석고를 잘라 조각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기존의 장운형을 이루고 있던 살점들은 뜯겨나가고 정화된 육신을 획득한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무덤을 통과함으로써 얻어지는 부활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에서 “어찌 되었든”으로 설명되는 삶에 대한 막연한 긍정성이, 『그대의 차가운 손』에 이르러서는 육신의 고통과 자아의 해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냉정한 구도(求道)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3. 불온한 일상의 폭력     


  삶의 불쾌하고 적나라한 모습을 들추어내는 방식은 한강의 작품을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이다. 한강은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 숨겨진 위선의 기미를 통해 삶이 얼마나 거짓된 표면들로 가득한지 보여준다. 하지만 거짓들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다. 주체를 구성하는 가장 진실한 것이 되어 주체의 내면을 구성한. 그러므로 삶이란 표면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나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신의 실존을 걸어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일상적 삶의 법칙들과의 결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2007)는 일상적 삶의 규칙들을 넘어서려는 두 남녀를 향한 상징계의 폭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우리 일상을 규정하는 타자의 시선을 기민한 감각으로 포착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브래지어를 풀어놓거나 혹은 채식을 한다는 이유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직장 상사들, 그리고 육식하지 않는 것을 비정상적인 행위라고 몰아가는 가족들의 시선, 억지로 육식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폭력은 영혜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몰아간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발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봣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 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채식주의자』, 19면.)    


  인간은 폭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킨다. 생존을 위해서 다른 대상을 수렵하고 채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와 폭력의 동일성은 인간에게 윤리적 고뇌를 준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했지만 “폭력은 존재에 선행한다.”라고 먼저 말해야 한다. 인간의 감춰진 동물성에 대한 기민한 감각을 보여주는 영혜가 육식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부드러운 언어에 감춰둔 발톱을 드러내며 영혜의 몸을 할퀸다.

  제2부에 해당하는 「몽고반점」 은 『그대의 차가운 손』의 마지막 장면의 모티프를 끌어오고 있다. 이 작품은 타자의 시선이나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 예술을 통해 서로의 순수한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을 다룬다. 서로 몸을 꽃무늬로 페인팅을 하고 두 존재는 형부와 처제 그리고 남녀라는 구분을 넘어서, 자연의 운동 그 자체를 체현하고자 한다. 기성의 육신과 정신의 관념을 넘어서려는 생의 비경(秘經)을 향한 초월이라고 할 것이지만 실패하고 만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행위는 근친상간의 행위로 밖에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3부 「나무 불꽃」에 이르면, 영혜는 스스로 나무가 되기로 작정하고, 그녀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내장들을 스스로 태워간다. 나무가 되는 일은 바로 생을 지속시키는 내장의 한 조각까지 태워버리는 고행의 길이다. 영혜의 육신은 말라가지만 오히려 그녀의 눈을 통해 나타나듯 잃었던 순수성을 회복해나간다. 그런데 영혜가 순수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상실한다는 것은 한강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이미지라고 보인다. 언어를 상실하고 침묵에 도달하는 일이 존재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과정과 일치한다는 점은 이후 『희랍어 시간』 (2011)이란 작품의 모티프로 작용한다.

  앞의 소설들 『검은 사슴』이나 『그대의 차가운 손』의 경우 현실의 극복과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채식주의자』는 상대적으로 그것의 불가능성이 더 크게 부각된다. 점차 삶이 가져오는 부정성과 세계의 황폐함이 작품 속에서 커지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세계의 부정성 앞에 패배한 상태로 남겨지는 것일까?

  한강의 세 번째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위의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대답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과 유사한 탐색의 구조로 되어 있다.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의 구조를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계의 부정성을 성찰해나간다. 인주라는 인물의 죽음을 통해서 부정성의 원인이 되는 삶의 조건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정희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인주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인주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스스로 떠안는다. 인주의 죽음이 삶의 부정성이 생성한 결과이며 그 죽음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삶의 비의가 드러난다. 우리는 정희나 『검은 사슴』의 인영과 명윤이 찾은 답이 삶의 실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추적 과정은 독자가 세계의 불온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는 『검은 사슴』과 그 결론에 있어서 미묘한 시각의 차이를 내포한다. 『검은 사슴』에서 인영과 명윤이 삶의 긍정성을 막연하게 확신하는 형태라면, 희정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무릎을 끌고 가서라도 잡고 쟁취해야 하는 ‘파란 돌’의 형상이다. 앞서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삶의 부정성 속에서 메말라가는 자아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과는 무척 대비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작가가 세계의 부정성을 영혜의 메말라가는 자아를 육체의 변화와 일치시켜서 빚어내려 했다면, 작가의 『바람이 분다, 가라』는 무력한 인간의 삶을 자각하면서도 존재의 의미를 찾아서 투쟁하는 삶의 윤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점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2013)에서도 확인된다. 어느 저녁 생명은 빛을 내뿜고 일렁인다. 폐허 속에서 인간의 파괴되는 몸짓은 현미경보다 더 명료하게 지각된다. 어두운 밤은 위태로운 별과 같은 운명을 공유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짓을 극적으로 비추는 조명이다. 가장 어둡기에 삶의 살풍경이 밝아지는 역설을 발견한다. 한강은 자신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에 실린 「저녁의 소묘」에서 저녁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저녁은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되어 무성해지는” 가득하고 충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밝은 연둣빛 눈들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검은 핏빛으로 잠기는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을 빼어 손목을 긋는 세계이다. 그럼에도 “(살아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저녁의 풍경이다. 아니 세계의 밤에 놓인 우리 인간의 숙명이다. 빛의 죽음이 놓인 저녁에 삶의 뿌리를 향해 손을 뻗는 모험을 시도하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계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병적인 탐미가 아님을 말해준다. 상대적으로 소설에 비해 시라는 장르는 작가와 시적 화자의 일치가 강하다는 점에서, “그 밑동에 손을 뻗”는 행위의 의미가 작가의 결기로 다가온다. “죽는다는 건/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 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심장이라는 사물 2」,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응시하던 작가는 「파란 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파란 돌」,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33면.)    


  파란 돌을 줍는 것으로 나타나는 생의 의지는 한강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정희라인 인물의 내면에서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     


  빗발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끈덕지게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차체가 거세게 흔들린다. 나는 숨을 토한다. 쒜엑 쒜엑, 거친 숨이 허파를 찢으며 울린다.

  두 눈을 홉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바람이 분다, 가라』, 386~387면)    


  배로 바닥을 밀며 파란 돌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의 고통은 상상만으로도 쓰라리다. 그렇지만 파란 돌을 줍고자 하는 의지로 표현되는 생의 추구는 어두운 전체의 소설 분위기와 달리 희망의 빛을 던져준다. 인주를 추적하며 감춰진 삶의 가치를 자각하고 끌어올리는 정희의 모습은 작가 자신의 투영인지도 모른다.      


   

  4. 침묵의 윤리    


  언어란 대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상을 왜곡하기도 한다. 언어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문(門)이기도 하지만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는 문턱이기도하다. 그렇기에 언어란 존재를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억압이기도 하다. 결국 언어로 말을 한다는 사실은 ‘침묵’이라고 밖에 표현될 수 없는 타자의 존재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성의 모험이다. 언어가 존재에 도달하지 못하고 대상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타자라는 존재의 이해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껴안기 위한 투쟁이라고 받아들일 때 윤리적이다.

  한강의 네 번째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은 눈이 멀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가 희랍어 시간을 통해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남자는 빛을 잃고 세계의 문이 점점 닫혀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모든 것이 소멸하기 세계는 아름답기만 하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실린 「저녁의 소묘 5」에서, 빛이 손목을 긋는 시간인 저녁에 그 밑동으로 손을 뻗기로 했다는 작가의 진술처럼, 말을 잃은 여자는 어둠과 다름없는 남자의 육체에 손을 내민다. 눈을 잃은 남자에게 말을 잃은 여자는 그의 손바닥에 몇 개의 문장들을 적어나간다. 여자의 행위는 생기를 잃은 남자에게 일종의 희열을 생산해낸다.    

 

그는 더 기다린다. 더 많은 말을 기다린다. 그녀의 얼굴에서, 몸에서 배어나오는 습기를 느낀다.      

(『희랍어 시간』, 181면.)    


  문자와 몸 사이에서 작동하는 희열의 순간을 소설은 포착한다. 빛을 잃고 언어를 잃은 그들을 이어주는 끈은 문자의 의미와 육체적 촉감의 경계에서 생산된다. 말이 몸의 촉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체험이란 어떤 것일까? 마치 붙잡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번뜩이고 사라지는 깃털 같은 언어가 습기처럼 번져서 몸을 살포시 덮어오는 경험일까? 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나던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습기가 번진 몸의 말들을 하나로 포개어놓으면서 교감한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찾아지는 희열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빛이 소멸하는 세계의 저녁을 초월하려고 시도하기보다 마주하기로 한다. 이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희랍어 시간』, 191면.)       


  여자는 남자의 육체에 침묵으로 다가섬으로써 말을 걸고, 남자는 몸의 체감을 통해 타자와 교감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랑은 언어의 바깥을 향한다. 어떠한 지배와 권위도 없는 둘 사이의 교감은 서로가 각각 ‘세계’와 ‘언어’를 상실한 부재의 고통에서 길어 올린 관계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자. 바로 존재의 부재와 고독으로부터 서로를 치유하는 방식은 상호적 이해와 연대에 있음을 보여준다. 『희랍어 시간』은 앞의 소설들(『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과 같이 비극적 세계의 부정성을 자기초월적으로 극복하기보다 타자를 껴안음으로써 세계를 마주하기로 결의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러한 작가의식의 변모양상은 그의 문학적 관심이 외부의 역사적 시공간으로 이동될 것임을 예고한다.

  한강은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2014)을 발표한 바 있다. 5.18 광주항쟁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하나의 문장이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어떤 비감과 공허를 선사한다. 우리는 손쉽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말 혹은 이해하여야 함을 역설하고는 한다. 하지만 작품을 읽으면 그 말이 얼마나 허약하고 가벼운 수사인지 체감한다. 타인의 고통이란 나의 고통을 참고로 상상되지만 언제나 실존의 가장자리에서 나의 상상력을 상회하는 체험임을 깨닫는다. 그 고통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강은 문장에 물질적 체감의 깊이와 희생자들의 절규를 담아내려고 시도한다. 5.18 광주항쟁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언어로 옮기는 일의 불가능성을 작가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을 터이다. 모리스 블랑쇼가 문학이란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이라고 지적했듯,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무력을 극한까지 내보이며 어떤 본질에 끊임없이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곧 작가의 ‘말걸기’가 보여주는 무력이 얼마나 깊은 치열에 토대하는지 작품을 통해서 알아차린다.   


 체머리를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직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만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소년이 온다』, 45면.)     


  『소년이 온다』에서 무엇보다 서늘한 지점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동호의 결심이다. 앞서 작품들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단순한 결심으로 읽히지 않는다. 동호의 결심은 『희랍어시간』에서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한 자의 시선과 공명한다. 자신조차도 냉철히 점검하고 용서하지 않기로 하는 윤리적 태도는 한강 소설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식의 성숙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써 작가의 육체를 비워내고, 정대라는 인물이 지면(紙面)에 족적을 남기게 하는 과정은, 문자를 통해 사라져버린 존재에 육신과 언어를 돌려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무속에서 말하는 접신(接神)을 떠올리게 하는 이 부분은 작품이 5.18광주항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제임을 암시한다. 초혼(招魂)이라고 하는 것, 망자를 불러오는 과정은 과거 사건의 재현을 지향하기보다는 고통의 감각을 통해 역사를 불러들인다. 말 없던 것들에게 언어를 돌려주는 것, 학살당한 시체들이 영혼이 되었으나 언어를 통해 육신을 얻는 형식, 죽은 자들의 고통은 발화와 함께 파괴된 육체의 형상으로, 살아있는 신체의 감각을 일깨우며. 신체 기관들의 곤두섬을 체험하게 한다. 역사는 정신의 관념이 아니라 몸의 통각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공통감각을 표현한다. 그리고 읽기를 통해 우리는 그 고통의 감각과 역사적 사건에 연루된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라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부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소년이 온다』, 17면.)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는 죽음의 고통이 결코 동호 개인의 것이 아니라, ‘너’로 지칭되는 ‘나’ 혹은 ‘우리’의 것임을 드러내는 대목에서, 피할 수 없이 내가 연루되어 있음이 구체화되고 있다. 한강은 분명히 ‘나’라는 일인칭의 주체의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너’라는 이인칭 주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글을 집필하고 있는 작가까지 그 결심에서 이탈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동호의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라는 말은 글을 ‘쓰고/읽는’ 모두의 내면을 향한다. 이러한 『소년이 온다』의 구조는 작가의 집필 의도를 압축한다. 폐허의 세계에서 떨고 있는 것은 결코 타자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 타자의 불행과 고통이 바로 나의 고통이며, 타자의 불행과 분리될 수 없음을 환기한다.

  지금까지 보았듯 한강의 문학세계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변주 혹은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에서부터 비극적 세계로부터 망각되었던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는 파란 돌을 줍기로 결심했다. 이제 그는 세계의 부정성과 대결하기로 선언했으며 가까운 현대사의 비극을 탐색함으로써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존재는 자연의 갈취를 통해서 지속한다. 그렇기에 폭력을 동반한다는 자명한 사실에 겸손해질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한강의 문학세계는 존재와 폭력이라는 두 진자의 운동 속에서 벌어지는 폐허의 양상에 대한 탐구이다. 거짓과 추함, 그리고 기형적이거나 불구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인간’이란 존재의 삶은 세계 속에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차라리 인간은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가장 윤리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가치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라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한강의 작품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무모한 답변의 시도가 아닐는지.

  한 작가를 이해하고 비평을 쓰는 과정이란, 내가 감당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작가의 문장을 피해 달아나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비평가는 작가와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도피 어느 경계를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가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비평가 또한 그의 작품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작가에게서 나를 발견했고, 그가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가장 인간적인 비평은 공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다는 겸허에서 비롯한다고 믿는다. 작가는 작품으로, 비평가는 비평으로, 어디까지 존재가 처한 비극의 원인을 해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궁극적 해명할 수 삶의 비밀은 얼마나 존재하는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말했듯 결국 앎이란 나의 무지(無知)를 자각하는 과정이며, 우리에게 오로지 허락된 것은 물음 그 하나, 구부러진 우주와 닮은 그 태초의 물음표를 따라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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