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리플리컨트의 세계
- 정우신 시집 《홍콩 정원》 (2021)
애정하는 정우신 시인의 《홍콩 정원》 (2021)이 우편으로 도착하자마자 그의 시집을 펼쳐보았습니다. 그가 만드는 '홍콩' 정원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요? 시집에서 말하는 ‘홍콩’이라는 고유명사는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현실의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런데 다시 ‘정원’은 존재를 속박하는 세계의 어떤 힘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시집의 제목 홍콩 정원은 바깥과 내부가 접혀지는 어떤 경계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시집 《홍콩정원》은 서늘한 기운을 품었지만 문장을 조어하는 방식은 단정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문장의 구성 방식은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 단정함이 1인칭 주어가 사물과 세계를 지배하는 서정시를 쓰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우신 시인의 시에서 ‘리플리컨트’라는 시적 대상이 복제인간을 뜻한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시적 화자가 하나의 복제된 주체라는 것, 즉 그것의 환영적 성격을 이미 시인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지요.
단정한 문장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사실 그의 시들은 서정적 화자의 죽음, 그 환영들이 사라지며 나타나는 세계와 사물들의 풍경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대면한 그 세계의 풍경은 미해결의 장이네요. 어쩌면 완료되기를 그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시 「무당 – 신내림을 연습하는 리플리컨트」에서 “대책 없이 죽겠지”라고 예감하며 “점괘과 완료되기 전/ 마을사람들 할복한다.”라고 쓰는 것은, 어떤 풍경들이 시적 화자에 의해 고정된 것으로 의미화되기 이전 오히려 의미화의 불가능성이 전면에 떠오르게 만듭니다. 바로 이것이 정우신의 시인의 시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요?
「不二門-건봉사의 항아리를 정리하는 비구니 리플리컨트」라는 시의 일부를 더 살펴봅시다. "불이 꺼진 적이 없던/ 가마솥/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새끼를 낳고 찾아가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시인의 서늘한 감성이 저의 눈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늘한 이미지의 중심에 있는 솥에 들어있는 새끼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 새끼는 바로 시적 화자 자신이겠지요.
그런데 이 시는 처음에 “선생은 절을 마치고/ 관으로 돌아가 누었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관(棺)에 들어간 ‘선생’에서 시작된 연상은 바로 뒤이어 가마솥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되어 이어지고 있지요. 이것은 솥과 관이 동일한 연상의 대상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 내부에는 비구니, 선생, 새끼라고 호명되는 무엇이 있지요. 이 무엇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구멍이 바로 이 시의 주인공일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오독(誤讀)을 하며 시인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경험한 시인은 맑은 눈을 가지고 겸손한 몸가짐을 지닌 멋스러운 사람입니다. 이 시집은 일면(一面) 그를 닮은 것 같습니다. 단정한 문장과 섬세한 그리움의 정서가 그렇게 보입니다.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의 문장을 끝으로 시집을 곁에 두고 아껴가며 읽어야겠습니다.
나의 전류가
혼자인 아이의 방에 있는
스탠드에 무심코
가닿듯
사랑이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변전소 –리플리컨트 폐기」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