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김경주, 기혁의 시들-
1. 예술의 종언과 극시(劇詩)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예술이란 절대이념의 진리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며 이념과 형상의 관계 방식에 따라 예술의 단계가 구분된다고 보았다. 각각의 예술의 발전단계를 상징적 예술단계, 고전적 예술단계, 낭만적 예술단계로 구분하고, 고전적 예술단계에 해당하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들이야 말로 이념과 형상이 완벽히 조화된 예술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낭만적 예술단계의 이후의 예술들은 자연스럽게 이념과 형상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즉 헤겔 미학의 논리라면 낭만주의 시대 이후의 근대 예술은 퇴락의 형식이다. 이념과 형식이 완벽히 조화되는 예술의 완성은 앞선 시대에서 끝나버린 것이다.
정말 헤겔이 선언하는 예술의 종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실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종언에 대한 선언이 성급했음을 안다. 예술이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변모한다는 그의 견해는 탁월하지만, 현재까지 예술은 새로운 미학과 작품을 생성하고 우리 일상의 관습을 교란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의 종언은 이르게 선언된 측면이 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헤겔이 낭만적 예술단계의 최후 예술형식으로 시문학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헤겔은 시문학을 예술 일반의 최고 단계로 보았으며 그 중에서 극시를 서사시의 객관성과 서정시의 주관성을 통합하는 최고의 양식으로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그가 고전적 예술단계의 그리스로마 시대의 비극을 문학의 완성된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극시는 서사시처럼 사건, 행동, 행위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의식적이며 활동적인 개인을 작용자로 정립해야 하며, 서정시처럼 외면에 대립하여 내면으로 와해되지 않고 내면의 외적 실현을 표현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극시란 서사시의 사건성과 서정시의 내면성이 매개됨으로써 제3의 형태로 표현되는 시와 극의 한 형태이다. 물론 헤겔이 말하는 극시는 그리스 비극을 모범으로 하는 것이지만 21세기에 극시를 논하는 일은 헤겔의 미적 범주로만 해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지금-여기에 나타나는 극시를 어떤 방식으로 조감하고 이해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극시에 대한 관심은 시인 황동규를 비롯해 최근에는 김경주와 기혁의 작품들에서도 지속하고 있다. 황동규는 극화(劇化)의 방법을 자신의 시론으로 구체화한 시인으로 극서정시(劇抒情詩)라는 용어를 사용해 자기 시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 외에 김경주와 기혁은 한 권의 시집을 하나의 극본처럼 구성하거나, 대화적 구성 방식을 사용해 시와 극을 혼합하고 극적 부조리(不條理)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시세계를 전개한 바 있다. 이제 이 글은 황동규, 김경주, 기혁의 시를 중심으로 그들의 시작법에 나타나는 시의 극화 방식의 원리와 특징 그러한 모색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 시인들의 시세계가 지니는 연결고리와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2. 서정의 극화(劇化)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현대문학사에서 거장(巨匠)으로 평가받고 있는 황동규의 시세계를 이 작은 지면에서 해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이곳에서 우리는 그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극화의 의미에 대해 가늠해보는 것에 한정하기로 하자. 황동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라는 시론에서 시가 지니는 극적 구조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다. 이와 관련해 한 명민한 평론가는 황동규의 시세계를 한 광대의 극적 가장(假裝)의 유희로 읽어내고 있다. 왜냐하면 황동규의 시는 전통 서정시의 문법과 달리 주체의 지각과 경험을 극중 인물의 이야기 형태로 무대화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의 가면은 시에서 단일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공존하며 발화되는 복합체를 추구한다. 즉, 황동규 시에 나타나는 극적 구조는 전통 서정시가 지니는 단성적인 목소리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나는 정욕을 느낀다 그대의
죽음에서. 답답하다. 언제나 한시다.
심야 방송이 시작된다.
잠시 불 껐다 놀라 켜고 담배 태우며
의자 타고 앉아
두 손을 내리고.
때로 뒤떨어진 사랑도 있어서
흐르는 연못같이
그대의 세계 밖에 잠시
남몰래 흐르고 있어도 좋은가.
누군가 기침을 하고
소박하게 마음을 포기하고
웃고 돌아설 수는 없는가.
잘못 살수도 있지 않은가
잘못 핀 꽃이 잘핀 꽃들을 돋보이게 하듯
그러나 그대는 눈으로 말한다.
이 삶은 단막(單幕),
다시 등장할 수가 없다.
무대 위 소도구들 뒤로
캄캄한 출구.
- 「허균 3」 전문
위의 작품은 황동규의 시집 『열하일기』 (1972)에 실린 허균 연작 중의 한 편으로 이 작품은 시적 화자가 이미 죽은 허균에게 삶에 대해 묻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의 독백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답 없는 상대에게 묻고 답하며 한 편의 일인극을 상연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둘이다. 독백하는 시적 화자 그리고 대답하지 않는 청자로서 허균이다. 시적 화자는 대답 없는 허균에게 “때로 뒤떨어진 사랑도 있어서/ 흐르는 연못 같이 남몰래 흐르고 있어도 좋은가”, “소박하게 마음을 포기하고 웃고 돌아설 수는 없는가”, “잘못 핀 꽃이 잘핀 꽃들을 돋보이게 하듯”이 “잘못 살수도 있지 않은가” 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들에는 시인이 바라보는 삶에 대한 태도가 잘 압축되어 있다. 뒤늦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나, 그것을 포기하고 웃을 수 있는 긍정의 마음 그리고 삶의 실패가 지닌 무의미가, 오히려 다른 삶들을 돋보이게 하는 무력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항변에는 삶의 아이러니를 응시하는 시인의 관점이 녹아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삶의 비의(秘意)는 전통 서정시와 달리 손쉽게 시인의 정신적 깨달음과 해탈로 해소되지 않으며, “이 삶은 단막(單幕)”과 같은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를 확인으로 귀결된다. 이상과 같이 황동규는 허균의 가면을 쓰고 시적 화자의 독백을 활용해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일인극을 상연하듯이 삶의 비의를 드러내기 위해 극적 구조를 차용한다.
그렇다면 황동규가 말하는 극화 혹은 극서정시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황동규의 극서정시 시론은 처음 하나의 체계화된 형태를 취하지 않고 전개되었다가 1992년쯤에 이르러 종합된 결과물을 내어놓는다. 그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密會)」라는 글을 통해 극서정시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 시의 후반에 가서 화자는 변화를 겪는다. 친구에게 욕하는 전화를 걸려다가 자신의 몸이 환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다. 굳이 종교적인 용어를 쓰자면 규모는 작지만 ‘거듭나는’ 변화를 겪는 것이다. 이런 거듭남의 변화가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서정시를 나는 극서정시(劇抒情詩)라고 부른다. … 중략 … 그러나 극서정시의 면모를 나의 ‘여행시’들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달리 없을 것이다. 그 시들은 하나같이 단지 여행의 즐거움이나 처음으로 만나는 풍물의 기이함과 기이함을 접하는 재미로 되어 있지 않고 일상을 떠나는 여행을 계기로 해서 이룩되는 삶에 대한 깨달음과 깨달음이 낳는 조그만 거듭남들을 담고 있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극서정시란 주체가 경험한 자기 체험의 극화를 뜻하며, 극화란 유기적 조직체로서 시의 구조와 사유의 틀을 초월하는 긍정적인 방향성을 지닌 비약적 변화의 순간을 뜻한다. 다시 말해 황동규가 말하는 극서정시란 주체 내면의 질적 변화를 극화의 수법으로 포착해 구성한 서정시를 뜻한다. 그가 여행을 통한 내면의 거듭남을 이야기하는 것도 앞의 시적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 여행은 자신의 관습적인 몸의 감각이 외적인 풍경들에 의해 자극을 받으며 새롭게 재구성되는 하나의 일상적인 계기이다. 시인의 정신은 바깥은 외적인 풍경을 만나며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이 바로 거듭남이다.
다른 배들이 그대의 배 둘러싸고
응시한다 생각할 때
배들은 부대낀다.
부두에 어깨 부딪기도 하고
옆 배의 허리를 건드리다
밀리기도 한다.
항구여, 항구여,
우리 감히 삶의 품이라 부르는 곳이여.
마지막 빈도로 남을 것이다.
파랗게 녹스는 청동 물결의 토르소
짧고 치열한 명상
공중에 뛰어오른 물결이 자신 잊고 빛남.
그 속에 나와 그대를 놓아두리라.
항구여,
- 「기항지 3」 전문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다른 배들이 그대의 배 둘러싸고/ 응시한다 생각할 때/ 배들은 부대낀다.”라고 말하며 배들이 서로 기항지 내부에 모여 부대끼는 풍경을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뒤이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내적인 변화가 발생하는데, 일상적으로 기항지는 항해 도중 배들이 잠지 선착해 머무는 곳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우리 감히 삶의 품이라 부르는” 생명이 움트는 장소로 갑자기 비약한다. 시인이 여행 중에 바라보는 항구의 풍경은 여느 일상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라는 비의적 의미를 품은 어떤 장소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황동규가 말하는 극서정시 혹은 극화는 일상의 체험과 어떤 정신적 관념이 맞물리며 내면에 솟아나는 질적 도약의 순간이며 삶의 비의를 극적으로 포착하는 수법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광대는 주체 내면의 확장이며 무대로 비유하면 배우의 역할 놀이에 가깝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선 주체 내면의 질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보면 전통 서정시의 범주를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다.
이 말은 황동규의 시세계가 가면을 쓴 배우의 연기술과 관련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의 시는 무대 위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엄밀히 생각하면 극이란 배우의 연기와 목소리만으로 가능한가. 극은 배우의 연기와 목소리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극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지닌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황동규의 극화란 광대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한 목소리의 다성적인 발화를 통한 서정의 확대를 지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하지만 황동규의 시세계가 보여준 극화의 시도 그러니까 그의 시가 보여주는 형식적 실험은 김경주와 기혁의 시세계를 예비하는 한 단계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그 세계의 양상과 그것을 떠받치는 정신적 토대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나 극과 시의 결합을 통해 제3의 양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황동규와 김경주 및 기혁이 창조한 시세계는 정신의 같은 장소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극화를 통해 서정의 확장을 시도한 황동규와 달리 김경주와 기혁이 몸담고 있는 시세계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황동규가 무대에 서 있는 배우의 목소리의 확대를 위해 극화의 방식을 차용한다면, 김경주와 기혁은 공연이 상연되는 무대 바깥에서 배우와 극적 오브제(사물/소품)의 움직임을 활용하고 배치하는 연출가의 관점에서 자신의 시적 언어와 극적 요소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황동규의 서정과 구분된다.
3. 실어(失語)와 실어(實語)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에서 김경주는 세계와 단절된 나를 타자로 인식하는 주체의 인식과 1인칭 주체가 사라진 곳에서 들려오는 체음(體音)의 변증법적 세계를 보여준 바 있다. 그에게 음악은 자신의 비어있는 내부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내 안의 울림과 상대의 음역이 가진 주파수가 맞춰질 때 하나의 음악이요, 시이며, 곧 사랑으로 완성이 된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 『기담』 (2008)에서도 체음의 변증법적 세계는 지속된다. 시집의 프롤로그에서 시인은 몸 안의 박동을 음악으로 그리고 몸의 음악이 형(形)을 이루는 것이 시의 언어라고 선언하고 있다. 지문을 사용해 시집의 지면을 무대로 가정하고, 그 위에서 행동하는 주인공은 ‘미지의 혀’로 상정하고 있으며, 음악이자 박동의 형은 시적 언어가 된다.
때 : 알 수 없는 사이
공간 : 언어의 공동(空洞)
등장인물 : 미지의 혀
이 극에서 ‘암전’은 극 전반을 감싸는 소재와 상징으로 사용된다.
어둠 속에서 언어들만이, 지면 속에서 떠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을 떠돌아다니듯이 부유하면 좋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암전.
음악 역시 특별히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지면이라는) 무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가지 연두에 둘 사항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음악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몸 안에 박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틈날 때마다 상기하는 것이다. 박동은 박동으로 인식되고 소리는 소리로 구별된다. 그것은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을 획득한다. 개가 짖는다. 그 개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에 개가 아니라 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심장에서 자신의 형신(形神)으로 퍼지는 파동이 피와 살을 떠가며 뜻 모를 파장에 각운과 각주를 다는 일을 느낀다. 그러므로 음악에 대한 신뢰는 호흡은 머지 않아 하나의 형(形)이 된다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 「제1부 인형(人形)의 미로」, 프롤로그 부분
김경주의 시집 『기담』이 보여주는 시와 극의 장르적 혼합은 그가 ‘사이’나 ‘틈’라고 표현하는 어떤 미지의 감각적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이다. 시적 이미지는 일상과 다른 어떤 과잉과 결핍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과잉과 결핍의 힘은 기성의 관습적 언어에 균열을 일으키고 경계에 있는 바깥으로 밀어붙인다. 그 바깥을 더듬으며 회귀하는 언어들을 통해서 시의 언어는 생성되며 언어에 차이를 도입한다. 시가 아닌 그렇다고 극도 아닌 어떤 장르적 경계에서 우리는 두 장르적 혼합이 만들어내는 비어있는 무중력의 사이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의미화하려는 언어들이 그 사이 공간으로 새어나갈 때 우리는 시어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기성의 언어들이 침묵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생생한 언어들의 존재가 함성이 되어 체음의 방식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이 장소가 바로 시인이 말하는 언어의 공동(空洞)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 살고 있는 저녁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늦은 그늘이 들어가는 자리다 그 저녁으로 들어온 그늘에 빗물이 묻으면 나무는 밤보다 어두워진다 어떤 짐승도 구멍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며 어떤 아이도 짐승처럼 구멍 안에 낮게 엎드려 울지 못한다 어둠은 저녁이 천천히 빚어내는 꿈이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저녁의 거미가 나온다
-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 -메리에게」 부분
어머니는 그날 아침 이빨 사이에 낀 아버지의 자지털을 손가락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어젯밤엔 사람을 태우지 않은 회전목마들이 피를 흘린 채 빙빙도는 꿈을 꾸었어요. 나는 육(肉)을 당신은 구(口)를 사랑한 세계, 내가 딱딱한 구멍을 벌려낳을 뼈는 지금 얼마나 구멍이 자라고 있을까요.
- 「미음, 미음을 먹어요」 부분
구멍은 오늘 있는 힘을 다해 깊이보다 거리를 인정한다
구멍 속에 아픈 곳은 정말 없는데
구멍 속에 표류하는 구멍
구멍만 아픈 눈치다
- 「구멍」 부분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김경주의 시에서 많은 구멍의 은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죽은 나무의 구멍”에서 자라는 거미, 어머니의 몸에서 자라는 뼈, 그리고 “구멍 속에 표류하는 구멍”의 이미지는 기성의 상징계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실재의 영역을 암시한다. 김경주는 상징계의 압력이 사라진 실어(失語)의 영역에서 출현하는 순수 감각의 세계를 구멍이라는 은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메를로퐁티가 말한 환상통(幻想痛)의 사례를 연상시킨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환자가 여전히 다리에 고통을 느끼며 환상통을 경험하는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는 언어와 몸의 경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살의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살은 언어와 몸의 사이에 존재하는 틈으로 ‘기관 없는 신체’(들뢰즈)이다. 김경주의 시에서 나타나는 사이나 틈의 공간으로 은유되는 구멍은 관습적인 언어와 일상의 경험적 몸의 경계가 접힐 때 발생한다. 그곳은 미시적 몸의 감각들이 활공하는 그러면서도 박동이 되어 음악이 되는 순수한 감각의 영역이다.
이제 김경주의 『기담』에 실린 작품들의 구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화적 구성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그의 시가 지닌 구성이 대화적이라는 것은 무대 위에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지문과 대사를 활용해 시를 구성하고 있음을 말한다. 앞서 인용된 「제1부 인형의 미로」 프롤로그에서 명확히 제시되고 있는 “이 (지면이라는) 무대를”의 문장의 일부분만 보아도 그의 시가 극의 대화적 구성방식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4.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불에 젖어 날리고 있는 여객기라는 생각
-이 부분은 그림자극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언제나 그림자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벽이었다
… 중략 …
“얘야 눈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벽에 비친 깊은 그림자란다.”
“엄마 우리가 그림자를 갖는 건 빛과의 계약이에요. 전 이 계약을 다 사용하겠어요.”
“팔이 아프구나. 손을 내러놓고 좀 쉬거라 벽이 피를 흘리잖니.”
생이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여객기를 띄우는 일이라는 생각, 새는 벽 속을 날면서 생식기를 크게 부풀리고 그런 새의 출산을 지켜보며 모퉁이의 그림자엔 푸른 불이 번진다. 이것은 어둠 속에서 벽의 출산을 바라보던 나의 첫 번째 여객기.
- 「다섯 개의 물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 시간」 부분
이러한 대화적 구성 방식은 어떤 의미가 규정적 진리로 수렴되는 것을 거부한다. 서로 어긋나거나 통합되지 않은 진술들이 나열되고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이 조합되면서 규정적 판단이나 사고를 중지시킨다. 하나의 명료한 의미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과 진술이 덧붙여지면서 계속 ‘그리고’의 형태로 연쇄되어 뻗어나간다. 이것은 김경주의 시들이 이성의 종합적 판단을 거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수집된 감각소여를 지성의 작용에 의해 도식에 따라 배치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우리의 정신은 어떤 대상을 지성의 작용에 의해 고정된 의미로 구성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지성의 작용은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선험적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식에 맞추어 왜곡해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김경주의 시는 수미일관한 극적 대화법에 어긋나도록 언어들을 배치하며 이성의 종합적 판단중지를 요청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대화적 구성방식의 어긋남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이오네스코나 베케트의 작품이 보여주는 부조리성과 연결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반복적으로 논의된 만큼 더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여기서는 김경주 시의 극화가 황동규의 극화와 어떤 정신적 관념의 차이에서 기획된 것인지를 정리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하자.
… 중략… 헛것의 비극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헛것인 지금, 무지개 속에 뼈를 만기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피눈물 속에 뜨는 무지개는 살아서 멀었다. 성인이 존재하지 않는 그 부족은 멸망해갔다. 피에 젖은 무지개는 마을로 돌아오고 길을 나섰다. 간혹, 무지개까지 풀쩍 뛰어올랐다가 웃음이 많아진 사자는 식물을 먹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혹자는 여기까지를 무지개를 숭배한 어느 이교도의 성인식이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서 ‘날아가 행동 위를 부유했다’라고 써둔다. 거기에 새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 뼈 하나를 구부려주었다. 무지개는 빛의 멀미들이라고 내 배우들을 홀리느라 스스로 배후가 되었다.
- 「연출의 변」 부분
김경주는 시집 『기담』의 말미(末尾)에 실린 「연출의 변」에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헛것의 비극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헛것인 지금”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삶의 일상을 본질로 상정하지 않고 헛것으로 인식하는 ‘정신의 뼈’를 잘 보여준다. 그에게 일상적인 삶은 “무지개”로 상징되는 환상적인 대상이며 그것은 피눈물이 젖어있는 불구의 것이다. 그리고 “날아가 행동 위에를 부유했다”라는 문장은 그가 삶의 비실재성을 인식했음을 드러낸다. 시인의 주체가 액체처럼 흐르는 방식으로 비인칭성을 드러낼 때 “무지개” 속의 삶은 불온해지고 “멀미”로 은유되는 실재의 언어(체음의 언어)가 도래한다. 그는 이 실재의 언어들을 다룸으로써 무대 밖의 배후에서 언어의 총체극을 조율하는 연출가가 되는 것이다.
황동규에서 극화란 낯선 풍경이 밀려와 1인칭 주체가 펼쳐놓은 의미망의 그물에 걸려들 때에 발생하는 서정의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하는 방법이었다면, 김경주에게 극화란 오히려 외부의 세계를 의미화하는 1인칭 주체와 단절해 도래하는 실어(失語)의 순간을 위한 것이다. 동시에 망각되었던 몸의 박동이 음악으로 전이되어 시적 언어로 표현되는 실어(實語) 순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여행으로 상징되는 일상적 삶의 경험과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정신의 관념이 맞부딪히며 빚어지는 질적 변화를 실재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황동규의 시세계와 달리 김경주는 자기 삶의 자리를 헛되고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무대 위의 배우 대신 무대 바깥에 선 연출가가의 입장이 되어 언어의 총체극을 구현하고자 한다.
일상적 삶과 1인칭 주체의 내면을 극화함으로써 현실적 삶의 아이러니를 극복하고자 했던 황동규는 주체가 속한 세계의 역사적 실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 김경주는 1인칭 주체성 그 자체를 심문함으로써 자신을 헛것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주체를 규정하는 역사의 실재성마저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는 상징계의 언어를 부정하고 사이와 틈으로 표현되는 순수한 체음의 세계 그러니까 몸 이미지를 발견하며 그 내부에서 박동으로 울려오는 미시적 순수 감각에 자신의 신체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자신을 1인칭 주체로 규정하려는 세계의 억압에서 벗어나 액체가 되어 부유한다.
4. 미아와 도주(逃走)하는 아이들
기혁의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2014)을 읽는 유력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의 시를 부조리극 기법과 연결해 읽어내는 경우이다. 실제 기혁의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연결은 인과성을 찾기 어렵고, 독자의 감정이입을 이화(異化)시키는 분산된 이질적인 화면을 통해 시인의 우수와 고뇌를 극적 체험으로 표현한다. 이런 특징은 기혁의 시가 부조리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제시해준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있는 바,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작품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미아(迷兒/未我)’라는 시어가 시인 자신의 내면을 지시한다고 보았을 때, 그는 어째서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여전히 미아라고 느끼는지 시인의 ‘정신의 지도’를 그려보도록 하자.
엄마의 손을 놓친 것들은 왜 멋이 있을까?
서쪽으로 돌아 나온 것들은 왜
명찰이 없는 것일까?
유령처럼 미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 「골드러시」 부분
어미가 없어도 모음(母音)을 발음할 줄 아는 고아처럼
뜻 모를 선율로 망명해 온 문명의 육신
읽히지 않는 책들이 말의 새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게 보인다.
-「화이트 노이즈 –알바로트의 새장에 눈을 들이다」 부분
연줄이 끊어진 가오리가
정말로 비를 내린다고 믿었다
상상 속에서조차
누군가를 태워 준 적은 없었지만
방패가 날아간 곳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연은 신호를 보낼 때나 쓰는 거란다,
병상에 누운 삼촌이 말했다
-「악천후」 부분
기혁의 시세계에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들은 우선 그의 시에 나오는 아이들이라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2000년대 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90년대까지 상징계의 주인기표로 위치하는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저항담론은 주로 김선우의 시로 대표되는 여성의 모성적인 신체의 순수성을 통해 표현되었다면, 2000년대 이르러 그 모성적 어머니라는 기표는 더 이상 주인기표로 작용하는 상징적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대항담론을 형성할 힘을 잃고 오히려 아버지라는 기표와 함께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부정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김민정의 시세계를 예로 들 수 있다.
이처럼 2000년대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부정하며 그들이 사라진 세계를 정면으로 대면하는 사건적 주체로 나타난다. 부모가 부재한 아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억압적이고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세계이다.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폭력의 세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모한 어른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부모가 공모한 세계에 연루되기를 거절한다. 실제 기혁의 시들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삼촌은 병상에 누워있거나 아이는 의지할 대상인 엄마의 손을 놓치고도 “엄마의 손을 놓친 것들은 왜 멋이 있을까?”라고 되묻거나 “어머니가 없어도 모음(母音)을 발음할 줄 아는 고아”이기를 자처한다. 이것은 부모 즉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도주하기 위한 일종이 제스처이다.
아이들이 끊어진 방패연을 보고서 “상상 속에서 조차 누군가를 태워 준적은 없었지만 방패가 날아간 곳을” 아는 것은 주어진 현실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확실한 도주로(逃走路)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놓치는 것”은 능동성을 지닌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필사적으로 도주하지 않고는 자기 존재를 구해낼 수 없음을 자각한 존재의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세계의 바깥, 즉 도주로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목숨만을 부지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해진다.
-「인상파」 부분
우리가 차려 놓은 ‘만약’의 무게가
네게도 믿음의 이면을 기댈 등받이를 갖게 했다면
그 모든 책임은 그리스도에게 있을지 몰라.
오랫동안 그는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있으므로.
주기도문을 마친 식구들이 너의 힘을 빌려
서로를 일으켜 세운 다음까지.
-「서양식 의지 위의 저녁 시간」 부분
그렇게도 죄가 없다면 미친 듯이 돌겠나이다
오아시스의 레코드들이 우릴 목마르게 기억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는 동안 음반이 튀었다 으깨진 무르팍을 아는 만큼만 접어 올렸다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사막에선 모두가 이교도였다.
-「아라비안 나이트」 부분
문제는 현실적으로 도주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가메쉬의 서사시 이후로 수많은 모험 서사들이 있지만 주인공이 모험을 떠났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모험이란 궁극적으로 자기성장을 동반한 실패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의 세계는 더 이상 모험이 불가능하고 인간의 존엄이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한 희미해”지거나 “최후의 만찬을 즐기”며 책임을 회피하는 무능력한 신(그리스도)의 세계이다. 기혁의 시에서 신이 사라진 세계는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부재하는 이교도들의 사막으로 잠재적 가능성이 소진된 불모지이다. 바로 이 시집이 곡진하게 누설하는 진짜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현실의 불모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희미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세계에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신념이라는 것은 가능할까? 그의 시들이 부조리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비전도 도래할 미래의 가능성도 점쳐지지 않는 현실성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이 닫힌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선택지는 자기 내부로 침잠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만 부모에게 어떠한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아이들은 더 이상 참조할 과거도 도모할 미래의 혁명도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현재의 현실을 무대 앞의 관객처럼 지극한 눈으로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 시집 제2부 제목이기도 한 드라마가 무엇인가. 드라마(drama)는 라틴어 드란(dran)라는 말에서 기원한 것으로 드란은 ‘~을 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드라마는 어떤 행동(action)의 가능성을 그 개념에 포함한다.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극적 에너지를 지닌 힘들이 발생함으로써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 말은 기표의 기의를 지니는 어떤 의미들이 생성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드라마라는 것은 무대 위에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생산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혁의 드라마는 그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부조리하다. 그의 무대는 “세계는 환상통을 앓”(「토르소」)거나, “아프지 않을 만큼만 당신을 후려치고 싶”(「밀림」)지만 주먹이 빠져나가 실패하거나, “원근(遠近)이 어긋”나서 “익숙한 곳에서부터 길을 잃곤”(「미아에게」)하는 미아의 세계이다. 그래서 어떤 행위가 적극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없고 원근의 세계를 벗어나 대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렇기에 그의 시가 지면이라는 무대에서 상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감각의 어긋남으로 표현되는 기미(幾微)들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어의 침묵을 직시하거나 기표와 기의가 서로 어긋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 무언극(無言劇)이 되고자 한다.
발없는 말들이 몸속 천리를 돌아
더는 갈 곳을 잃고 침묵으로 변해 갈 때,
뒤따라온 어감(語感)들은 어디로 흐른 것일까
-「화이트 노이즈 –내부로부터의 소음을 잊기 위해 나는 울었다 그리고 슬퍼졌다」 부분
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애기하는 사람 1’과 ‘지나가는 사람 2’는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진다
-「사춘기 아침」 부분
검은 심해가 떠오르지 않도록
저마다 입속에 넣고
침묵하기로 했지.
그러나 너는 좀처럼 죽지 않는 행간,
행간에 고인 슬픔의
폐쇄 회로.
-「무언극」 부분
기혁의 무언극은 침묵을 지향한다. 이때의 침묵이란 모리스 블랑쇼가 말했던 언어를 통해 언어의 배후를 드러내고 언어로 표현된 것을 넘어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누설되는 사건이다. 우리의 언어는 편견들로 얼룩져있어서 투명하지 않기에 단일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도록 그것을 와해시켜 언어의 바깥을 대면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때의 침묵은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어떤 바깥과 대면하도록 이끄는 어떤 부재이다. 바로 이러한 바깥으로의 이끌림을 통해 우리는 나를 둘러싼 무수한 기성의 무수한 관계들을 단절하며 침묵에 다가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영도이다.
기혁의 무언극은 침묵으로 표현되는 부재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들을 지면이라는 무대 위에 상연한다. 그의 무언극은 “발없는 말들이 몸속 천리를 돌아/ 더는 갈 곳을 잃고 침묵으로 변해”가고, “애기하는 사람 1과 지나가는 사람 2의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지”며, “행간에 고인 슬픔의/ 폐쇄회로”처럼 기성의 관계들로부터 단절되는 묵언(默言)의 세계이다. 이렇듯 기혁이 무언극적 침묵의 시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점에서 필연적이다.
앞서 말했듯 아이들은 부모의 세계로부터 도주하고자 하지만 현실을 초월한 바깥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막의 세계에는 이교도들만이 가득하다. 이런 불모지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중의 한 명인 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글쓰기를 통해 나를 포획하려는 언어를 거절함으로써 기성의 관계들과 단절하고 언어가 포획에 실패함으로써 도래하는 순수한 침묵의 세계 내부에서 자기 윤리성을 지켜내는 일이다. 바로 침묵도 기성의 정치에 대항하는 견고한 문학적 저항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의 시가 말하는 혁명이란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직관 아래 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혁의 혁명은 차가운 감각적인 직관을 통해 파악된 어떤 기미들이지 적극적인 행동이 아니다. 바로 “누군가에게 혁명은 전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궤도를 이탈해 온 감정일 뿐”(「분신」)이거나, (혁명이라는) “환영을 보려다 피를 본 아이들이/ 장롱 속에 잠”(「블랙마리아」)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혁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실을 직시하며 혁명 그 자체에 의문을 되돌려주는 일이다.
눈사람과 눈싸움을 하면
피를 흘릴 수 있을까?
지문이 없어도
포옹을 할 수 있을까?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를 떠올린다.
색색의 관객들이 두 팔을 벌린다.
-「비너스」 부분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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