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May 23. 2021

소년은 울지 않았다

- 허연의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1. 관념의 유물론     


  프랑수와 튀르포 감독의 영화 『400번의 구타』 (1959)는 폭력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하다가 소년원에 입소하게 된 앙트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왕트완이 소년원에 입소하게 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어떻게 한 사회가 평범한 소년을 불량청소년으로 낙인찍는지 보여준다. 카메라는 감정의 과잉이 없는 차가운 눈으로 왕트완의 주변을 응시하고 한 소년의 뒤를 쫓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어른들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앙트완을 소년원에 입소시킨다.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앙트완이 아니라 일상의 사회적 질서이다. 소년원에 입소한 앙트완은 어느 날 동기들과 축구를 하다가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구멍 뚫린 철창을 뚫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질주한다. 약 십 여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숏으로 구성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억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자유를 향한 왕트완의 몸부림을 목격한다. 그리고 질주 후에 도달한 곳은 흑백 화면 너머로 보이는 검은 바다이다. 


  검은 바다는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어떤 낙원이나 희망의 표상일 수 없다. 검은 액체와 흐릿한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 될 때 우리가 그 이미지에서 보게 되는 것은 질주의 실패이다. 소년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검은 바다가 보여주는 것은 완강한 장벽이다. 바로 어디에도 도주로(逃走路)가 없음을 환기시키는 막막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검은 바다의 뒤틀린 이미지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검은 바다는 하나의 심연이다. 인간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신의 묵언(默言)이기도 하다. 


  소년이 질주 끝에 도달한 검은 바다와 그곳을 바라보는 앙트완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카메라의 응시는 관객들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관객의 감정을 촉발시키기 위한 어떤 연출적인 수사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을 카메라가 리얼하게 바라보고 있음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의 실체는 어떤 현장을 카메라의 시선과 일치되어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경험이고 결과적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무기력한 목격자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 영화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무력함의 감정이야 말로 우리 자신의 윤리성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지점이다. 


  마찬가지로 허연의 시는 관찰자의 시선을 통해 세계가 부여하는 어떤 의미들을 자기 내면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받아들이고 그 자극이 주는 감각들을 투명한 시선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허연의 시작(詩作) 태도를 두고 많은 평자들이 소년의 정서나 그리움 혹은 비애의 정서로 읽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의 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비애의 감정들은 시인이 세계를 응시하는 시선이 훑고 지나간 뒤에 남은 여진(餘震) 같은 것이다.


  허연의 시를 읽으면 작품 속에서 사물과 세계가 투명하게 비춰지는 순간은 시적 화자의 시선이 외부를 경유해 시인 자신의 심부(心府)를 향할 때이다. 그는 자신을 실험실의 표본으로 삼은 뒤에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미(幾微)들을 해부해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에 능숙하다. 이러한 시적 연상의 방법은 관념의 주관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관념의 유물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의 내면이지 외부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아도로노가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했던 것은 사물의 가상적 이미지를 주체의 내부로 가져와 변증법적 지양을 과정을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을 허구적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의 문제는 주체가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사물의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한다는 점에 있다. 거짓된 화해와 지양의 과정이란 허구적인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과 경계를 인식하는 끊임없는 비판적 지성의 의식화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유물론자는 세계의 표면에 자기 정신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내부의 경계와 간극을 면밀히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차가운 응시를 기초로 한다. 자기 정신에 떠오르는 사물들의 운동을 면밀하게 조감하는 응시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허연의 시적 진술은 자기 내면의 허위와 환상 그리고 치욕의 경험을 독백하듯 누설하지만 시인의 진술이 만들어내는 서늘함은 자기의 관념을 타자처럼 응시하는 차가운 관찰자의 시선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연은 쉽게 무엇인가에 대해 단언하거나 선언하지 않는다. 단언이나 선언은 조급함을 드러내거나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세계의 표면과 그와 인접해 발생하는 내면의 기미들이다. 그는 세계의 바깥으로 달아나지 않는다. 그는 세계와 마주해 떠오르는 자기 내면의 관념들을 차갑게 응시하는 관찰자로 주체를 위치시키며 자기 존재의 감각을 빚는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수사가 적고 정서적 과잉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절망뿐인 것인가. 아니면 어떤 낙관의 가능성이 남아있는가. 이 같은 질문에 그는 침묵한다. 어디까지나 그가 보여주는 것은 견인주의적 자기 응시의 과정에서 여과된 이미지들이다.           


  

  2. 소년기(少年期     


  허연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그의 시 속에 나타나는 소년의 의미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 (1991)에서부터 시인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사실상 세계로부터 버려진 존재라는 말이 어울린다. 스스로 세계를 ‘지옥’이라 칭하는 위악(僞惡)적인 소년들은 어쩌면 세계로부터 버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돌아보면 “세상 같은 건 더러워버리는 것”(백석)인 것으로도 보인다. 


  시인의 시세계에서 소년들은 “사는 게 죄지. 쓸데없이 존재만 무거워” (「그날」)진다고 인식하거나, “함께 사는 건 함께 죽는 것 치열하고 아쉬운 것”(「지옥에서 듣는 빗소리」)으로 지옥의 중심에 서 있다. 소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란 근본적으로 ‘죽음’이 일상인 불모지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세계의 압력 앞에 그들은 깊은 허무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소년들은 부모들이 만들어놓은 기성의 세계에 편입하지 못한 패배자들에 불과한 것일까?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2008)에서 소년들은 대놓고 ‘나쁜’ 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조숙한 허연의 소년들은 어른의 목소리를 모방하며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어른이 아닌 소년들이라는 점에서 기성의 세계에 속하지 못(안)하는 검은 피를 계승한 불온한 존재로 남는다. 상징계라는 등록소에 자신의 정체성을 등록하지 못하는 소년들은 상징계의 언어 바깥에 자리를 함으로써 ‘나쁜’ 소년이 되기를 자처한다.


  소년들은 상징계의 바깥에 자리함으로써 기성의 세계가 불완전하고 우연적임을 폭로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허무를 자신들의 도주로(逃走路)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년들은 분명하게 세계가 주는 압력을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편치도 못”(「포(脯)를 떠 버린 시간」)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행복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대가 납작 엎드려 신음하며 살았던 몹쓸 것 천지인 세상”(「길바닥이다」)이기 때문이다. 즉 소년들은 단순히 세상을 부정하며 자기의식의 가상으로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편입되지 못한 상징계의 바깥(길바닥)에서 세계의 폭력을 응시한다. 


  그러나 허연의 시세계에서 시적 화자로 등장하는 소년들의 고통이 도드라질수록 주체와 마주한 세계의 폭력은 크게 나타난다.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의 내면이 세계의 압력에 의해 해체될 때 더 이상 그곳은 어떤 선(善)이나 신념이 자리하기 힘든 폐허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믿음과 신념이 거짓이 된 공간에서 낙관적인 희망과 긍정의 태도는 그야말로 근거 없는 비현실성을 지닌 가상이 되어버린다. 바로 그의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2012)와 『오십 미터』 (2016)는 이러한 신념과 믿음이 사라진 탈이념의 세계 양상을 다루고 있다.


  허연에게 2000년대 이전의 전사(前史)는 “말로 꺼내지 못한 신념들이 타들어간 시간. 봄날은커녕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던 시간.” (「좌표 평면」)이며, “그 반항의 대가는 한 번의 ‘빠지직’ 소리와 한 번의 불꽃”(「전철은 하수다」)으로 끝나버린 실패의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무념무상으로 살지 못했던 날들을 …… 후회한다.”(「무념무상 2」) 시인이 토로하는 후회는 실패로 끝난 반항을 경험한 자의 목소리이며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허무는 이미 세계의 실상을 알아버린 자의 정조를 담고 있다.         


  

  3. 의지와 윤리        


  그렇다면 다섯 번째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는 기성에 보여주었던 시인의 시세계와 어떤 변별점을 지니는가. 이 시집은 여전히 세계의 허무를 대면하는 시인의 환멸감이 녹아있다. 거짓된 낙관에 모르는 척 속아줄 수도 없고 폐허의 세계를 긍정할 수도 없는 곤궁한 주체의 입장에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란 상징계의 바깥을 배회하며 세계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는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나쁜’ 소년의 자리를 지키며 배회하기 보다는 다시 세계의 바깥에서 그 내부로 되돌아오기를 시도하고 있다. 비록 그 모습은 어떤 불구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 시집의 주체는 더 이상 세계의 바깥에 내몰린 나쁜 소년의 목소리가 아니라 세계 내부의 중심으로 되돌아올 의지를 지닌 아이들이다. 그럼 의지를 품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한 인터뷰 기사에서 “남자들이 시스템과 대립할 때 패배하거나 저버리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데 반해, 여성은 그 사회 안에 머무르면서도 굽히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남녀의 성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핵심은 패배감에 현실을 망각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거나, 그렇다고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닌 사회 내부에 굽히지 않고 머무를 때 우리는 주체의 견인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허연의 「소년  記」 라는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간신히 통잠을 자기 시작할 무렵

진석이네 누이가 

병원도 못 가보고 퉁퉁 부운채 죽었다.

소년원에 갔던 

동네 아이들 몇 명은 

이만큼 커서 돌아왔다

복이라곤 없는 녀석들은 

열여덟도 되기 전

폐를 앓기도 하고 

손기락이 잘리기도 하고

아픈 아이도 낳고 그랬다  

   

그 며칠

미군 부대서 흘러나온

낡은 오르골에선 매일 똑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여자애들 몇은 동두천으로 의정부로 갔고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싸늘한 평상에 누어 오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구름은 달아나기만 했고 ……     


- 「소년 記」 부분      


  이 작품이 보여주는 시적 풍경은 “진석이네 누이가/ 병원도 못 가보고 퉁퉁 부운채 죽”어나가거나, “복이라곤 없는 녀석들은/ 열여덟도 되기 전/ 폐를 앓기도 하고/ 손가락이 잘리기도 하고/ 아픈 아이도 낳고”하는 불구의 세계이다. 시적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으며 신체의 훼손으로 나타나는 불구성이 강조될 정도로 부정적이다. 마을 옆에는 미군 부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여자애들 몇은 동두천으로 의정부로 갔고”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소년은 그럼에도 “싸늘한 평상에 누어 오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마을을 떠나버린 친구들을 기다린다.


  이 시는 감정의 개입이 최대한 절제된 상태로 시적 화자인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가 하나 둘 파괴되는 과정을 차가운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소년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를 통해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년들이 병에 걸려도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처지이고, 여자 아이들은 동두천의 어딘가로 팔려갔으며, 손가락이 잘려서 불구가 된 아이도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정말적인 상황임에도 마을 내부 어디에도 어른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존재의 부재는 이 시가 철저히 소년의 시점에서 씌어졌으며 현실의 참혹을 만들어낸 존재가 바로 부재하는 어른들임을 암시한다. 아이들의 죽음과 병은 부재하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사후적 결과들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인 소년은 부재하는 어른들에게 어떠한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다만 이 시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어떤 의지의 국면이라면 “싸늘한 평상에 누어 오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을 부르는 시적 화자의 행위이다. 시적 화자가 평상에 누어 느끼는 ‘싸늘하다’라는 감각적 진술은 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잘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또한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시적 화자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돌아오지 아이들의 죽음을 암시한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 죽음을 맞은 아이들에 대한 일종의 애도로 해석될 수 있으며, 둘째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사라진 존재를 강하게 자각할 때에 발생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오히려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시적 화자의 의지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찌되었던 시적 화자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평상에 누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자청해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망의 세계에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그 중심의 자리를 지키고 누워서 사라진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절망에 쉽게 굽히지 않는 시적 화자의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학적 윤리성을 확보하도록 해준다. 즉 이 시는 현실의 절망에 굽히지 않고 견뎌내는 시인의 곧은 의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의 세계를 향한 소년의 차가운 응시는 주체가 세계의 풍경을 지배하는 1인칭 서정의 세계나 주체의 세계가 합일되어 어떤 초월적인 화해의 세계로 나아가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문학은 화해의 세계가 아니라 끝없는 불화의 세계로, 우리가 작품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끝없이 화해가 유보되는 화해의 (불)가능성이다. 이런 점에서 허연의 시들은 서정시가 지닌 정서적 과잉의 위험에서 뒤로 물러나있다.            



  4. 패배도 아닌 죄책감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소년 記」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의미란 텍스트와 독자의 내면이 접속하는 경계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1970-8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시인의 정서와 경험에 안개처럼 끼어있는 역사의 표정을 읽는다. 가난과 절망이 일상이던 시절에 유년을 보냈던 시인의 정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한 착각은 세계가 나아지고 있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세상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해 세상이 더 나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비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의 불안과 균열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무지(無知)의 행복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허연의 「80년대」를 읽어보자.      


자취촌에는 사복들이 서성거렸고

밥 타는 냄새가 나던 어느 저녁 

나는 원고지 칸을 무시한 채

짐승의 시간들을 적어야 했다    

 

돈이 생기면 아나고회를 사 먹었다

애인은 젓가락 끝으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동백이 지천이라는 고향 섬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나면 애인은 한 사나흘 아팠다  

   

지리멸렬했다

도서관에서 훔쳐 온 책을 재독하거나

너덜거리는 속옷을 빨고 또 빨았다

가끔 크고 붉은 우표가 붙은 옆서가 배달됐다     

저녁마다 우리는 패배만 했다    

 

나는 좆도 아니었다.

나는 좆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니었으므로 

봄남을 갔다고 말하지 못했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었던 우리는 

늘 깊게 잠들지 못했다     


-「80년대」 부분      


  시인이 회상하는 1980년대는 한마디로 “지리멸렬”하다. 그리고 이 지리멸렬함의 정념은 허연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한다. 한 시대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인식은 당대의 산물인 자기 존재의 지리멸렬함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세계 내의 존재이기에 존재를 규정하는 세계 밖으로 초월하지 못한다. 세계 내의 무수한 관계성의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세계 내부의 힘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자기 존재를 형성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인이 고백하는 지리멸렬함은 자기 삶의 현재에 대한 고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녁마다 우리는 패배만 했다”는 진술은 세계 내의 삶과 자기 존재의 운명에 대한 자각이자 예감을 내포한다. 그럼 패배를 예감하는 운명을 껴안고 현재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언어 그 자체이다. “나는 좆도 아니었다/ 나는 좆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니었으므로/ 봄날은 갔다고 말하지 못했다”라는 진술에서 보듯 시인은 “나는 좆도 아니었다”라고 진술함으로써 패배 선언 자격이 없는 존재로 자신을 격하시키고 “봄날은 갔다”라는 선언을 유예한다. 이처럼 선언의 유예를 불러오는 언어적 굴절을 통해 그는 허무주의적 패배주의로부터 비껴나며 역설적으로 봄날의 가능성은 여전히 보존된다. 이 같이 허연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견인주의는 과거 『동두천』 (1979)의 시인 김명인의 시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허연의 시가 1970-80년대를 경유해 어른들의 세계를 소년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반대로 김명인의 경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윤리적 주체의 관점으로 쓰였다. 두 시인의 시세계는 시적 주체를 둘러싼 세계에 환멸을 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명하지만 시인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소년 혹은 아이들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김명인의 동두천 연작 중의 한 편을 간략히 살펴보자.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학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소 李가든가 金가든가

朴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가 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동두천(東豆川) 4」 부분     


  시적 화자는 동두천 근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재직하던 중에서 혼혈아인 한 여자 학생을 떠올리고 있다. 소녀는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라고 말을 하는데, 시적 화자는 그녀의 말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소녀의 웅변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풍경은 다음과 같다. “일곱 살 때 원장의 성을 받아 ……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가 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이때 “때린다.”라는 시어는 시적 화자가 느끼는 심적 고통을 형상화하고 그가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의 단면을 암시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지점은 시적 화자가 자각하는 죄책감의 감정은 아이와 시적 화자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성립한 이후 발생한다는 점에서 아이가 시인의 내면을 자극하는 타자로 경험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이를 경유해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를 통해  김명인의 아이들이 시인의 윤리의식을 자극하는 대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어른)으로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무력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가 느끼는 죄책감은 현실의 부조리 앞에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이라고 자각하는 김명인에게 1970-80년대의 세계는 그가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실존적 현실이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욕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무력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견뎌내는 것뿐이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떠올린다면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허연과 김명인의 시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두 개의 모나드가 아닐까. 


  김명인의 시세계가 아이를 거울로 삼아 자기 삶의 현실에 가로놓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을 인식하고 무력한 자기 존재의 욕됨을 성찰하는 윤리적 개인의 발화를 보여주고 있다면, 허연의 시세계는 당시 떠나거나 사라졌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유령이 되어 회귀한 것은 아닐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의 거시적 탐구라는 문제에서 유령처럼 사라진 아이들이 다시 회귀해 자기 삶의 구체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인가. 


  허연의 시세계는 김명인의 무력한 개인의 죄책감이나 혹은 퇴폐적인 패배주의로 침잠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현실의 부조리를 그대로 응시한다. 김명인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은 역사의 바깥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 내부에서, 즉 허연이 말하듯 길바닥에서 자기 삶을 앓으며 현실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허연이 고백하듯 “절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패배」)안에 있다. 그 시간들의 굽이마다 어떤 모양이 되었던 삶은 흐른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심으로부터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나가지 않”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중심에 관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심이 있어야 떠날 수 있다는 말은 세계의 바깥은 없다는 시인의 차가운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시에서 수직적 이미지들이 자주 발견되는 것과도 상통한다. 예컨대 “그런 것들이다 언제나/ 어른들은 타협하고 소년들은 트램펄린에서 떨어지고” (「트램펄린」), “인생이라는 건/ 식어서 떨어진 새들만이 아는 걸까” (「애인에게 비밀로 하겠지만」), “선캄브리아기 생명체들이 바다를 떠나 세상으로 기어오르는 것이다.” (「역전 스타벅스」), “비는 체념이다. 나는 몇 시간째 생을 내려다본다.” (「21세기」), “창밖/ 플라타너스 나무에선/ 툭툭/ 나뭇잎들이/ 폐족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시립화장장」) 등등. 허연의 시에 등장하는 수직적 이미지들은 낙하하고 추락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 특유의 허무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세계의 액면 전체를 포획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허연의 시 중에서 「세상의 액면」이라는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39층에서 내려다본 이승의 액면.

뚜렷한 금이 사라졌다가는 이어지고,

거리를 가득 메운 세상의 수많은 모자들.

모자에 감춰둔 금서들과 

개 같은 여름의 추억들.

거칠기만 한 모서리들.

     

굴뚝 속에서 날아오르는 깨달음의 새들.

하나 둘 하나 둘,

일기를 쓰는 그날 저녁의 근육들.

야근조의 눈에 반사된 십자가.

숯이 되어버린 길 잃은 양들, 버스를 가득 채운 근심스러운 성자들.     


폐수와 나란히 흐르는 생生.

전동차 속에 처박힌 외투들, 그리고 

비슷한 무게의 이데올로기.

봉인되지 않은 회색 유골함. 출간되지 못한 서책들.

이승이라는 신전.

빨랫줄에 내걸린 무희들.     


- 「세상의 액면」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건물의 옥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천상에 거하고 있는 신의 입장에서 이승의 감춰진 이면들을 응시하고자 하는 것처럼 그는 집요하게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이승의 풍경들은 “뚜렷한 금이 사라졌다가 이어”져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있고, “모자에 감춰둔 금서들”이 “거칠기만 한 모서리들”로 다가오는 곳이다. 한마디로 시적 화자의 말처럼 “개 같은 여름의 추억”을 닮았다. 


  감정이 절제된 어조로 시적 화자의 눈에 비치는 풍경의 이미지가 연쇄적으로 제시되며, 시적 화자는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집요함이 느껴지는 이승을 향한 응시는 그 내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풍경에 대한 묘사로 나아간다. 그들은 “야근조의 눈에 반사된 십자가”를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숯이 되어버린 길 잃은 양”의 모습을 하고 “버스를 가득 채운 근심스러운 성자들”과 같이 도시의 중심을 배회하고 있다. 


  이곳은 어떠한 희망이나 낙관도 “비슷한 무게의 이데올로기”로 여겨지거나 “봉인되지 않는 회색 유골함“처럼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죽음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의 풍경을 시적 화자는 “폐수와 나란히 흐르는 생生”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승의 삶이 혼탁한 폐수와 뒤엉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은 경험적으로 납득할 수 있으나 그것이 현재적 삶의 부정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는 세상을 “빨랫줄에 내걸린 무희들”이 춤추는 “이승이라는 신전”으로 바라보며 세상의 액면을 뒤집어 응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세상의 액면이 보여주는 조로(早老)해버린 세계의 실상을 언급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정하지도 않는다. 절망도 기쁨도 아닌 어떤 장소(39층의 건물)에서 세계를 응시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이처럼 시적 화자가 허공에서 지상의 삶을 내려다보는 행위는 세계 전체의 실상을 포착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디까지나 허상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말했듯 인간은 지성의 한계로 세계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한계 내에서 인간은 자기 세계를 구성하고 그 내부에서 삶을 기획한다. 그럼 우리는 이 같은 세계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애초에 시인에게 세상이 허상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허상이라도 그것이 분명 실재(the real)하는 실감(實感)으로 다가온다면 그는 생을 다해서 노래할 뿐이다. 대신 시인은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시인이란 자기 내면을 흔들며 도래하는 감각과 정념을 노래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 삶을 뒤흔들지 않은 것들에 붙여줄 이름은 없다. 내게 와서 나를 흔들지 않는 것들은 모두 무명이다.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적어도 이 생엔.     

「절창」 부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