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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an 03. 2021

섬세한 지성과 견고한 열정

2021년 1월 3일

  이번 학기 성적처리를 끝으로 다시 백수가 된 나는 연말과 새해의 고독을 위로하며 세 권의 서적과 함께 보냈다. 우선 두 권은 서영채 선생의 <미메시스의 힘> (2012)과 남진우 선생의 <폐허에서 꿈꾸다> (2013)로 두 선생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문체와 사유와 논리의 전개방식 그리고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저서는 대체로 퇴락하는 세계의 정조와 그것에 대응하는 문학의 논리를 섬세한 비평적 언어로 구체화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와 비인간화로 인해 퇴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안간힘을 쓰며 현실에 응전하고 있는 우리 한국문학의 위상을 섬세한 지성적 언어로 맥락화하고 조율하는 데에 그 글쓰기들이 각각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예술 행위로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의 해명은 실제 작품들이 지닌 미적 근거들을 맥락화하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평론이라는 실천 행위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선생의 글은 나름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맥락화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여부는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며, 그것이 지금 현재 문학 작품들에 대한 과도한 상찬과 현학적 의미화에 바쳐지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진실이겠다. 그럼에도 두 책은 적어도 나에게 즐거운 독서의 경험이었다는 점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더불어 두 선생이 사유를 전개하고 의미화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정신분석비평이 가진 아름다움과 한계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신분석이론이 지닌 아름다움은 인간이 은폐하고자 하는 숨겨진 무의식적 실재를 포획하고 찾아내는 데에 유용한 분석 도구라는 점이다. 그것은 글쓰기가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하고자 하는 인물들과 작가의 무의식을 파고들어서 말하지 않았으나 말하고 있는 것, 말하고 있으나 감추고 있는 것들을 분별하고 의미화하는 데에 적절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 현대 문학이 보여주고 있는 난해함과 글쓰기의 특징을 조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분석 이론으로 인간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한 단계를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이론이 가진 도구로서의 한계, 구조화가 주는 유용함과 동시에 그것이 패턴화된 분석방식으로 반복되었을 때 비평적 긴장감이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책은 권성우 선생의 산문집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2019)이다. 이 책은 권성우 선생의 산문집으로 에세이스트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의 아름다움은 평소 선생의 내밀한 성찰을 일상의 언어로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원 석박사 시절 선생의 저서 <비평의 희망> (2001), <모더니티와 타자의 현상학> (1999), <횡단과 경계> (2008) 등을 읽었고, 대학원 박사 시절 중반에 권성우 선생의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 당시 선생과 마르크스 평전, 김산의 아리랑 등을 읽고 간략히 토론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시절 체게바라 평전을 읽은 이후 대학원 수업 시간에 접했던 두 평전의 기억은 선생이 저서에서 밝히고 있지만 평전 문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생의 귀중한 면모는 과잉된 칭찬과 손쉬운 비난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균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점은 나 자신도 글쓰기를 할 때 마다 항상 고려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손쉬운 비난을 자제하고 작품을 읽되 과잉된 상찬에서 거리두기를 하는 섬세한 지성이 문학을 사랑하는 열정과 함께 어우러질 때 비평은 순수하게 저 너머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아와 이러한 선생의 태도는 여전히 산문집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2부가 마음을 움직인다. 이 글을 쓴 선생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삶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사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문장들 때문이다. 짧은 단상의 형식으로 구성된 2부의 경우 근원적 인간의 이해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현실의 절망이 주는 허무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안간힘이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욕망의 비움을 얘기하고 그러한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보이는 사람도 결국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욕망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으리라.”, “진보에 대한 맹신, 개혁에 대한 조급한 마음을 극복하는 것, 역사의 허무를 깊게 인식하면서도 손쉬운 청산에 손 내밀지 않으며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인생을 살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내 어떤 부분들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등등 책에 적혀있는 문장보다 그 문장이 지나간 바깥의 여백에서 드러나는 정서들이 더 많은 것들을 말해줄 때가 있다.


  선생의 문장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허무의 심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미 칸트가 근본악에 관해 말했듯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이성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뚫고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문제는 두 가지이다. 그럼에도 마주하고 나아가느냐, 모르는 척 위선이나 떨며 속물로 살아가느냐. 이 문제에 대해 선생은 글쓰기라는 방식을 통해 정면으로 응시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 이 책을 읽으며 선생이 조금 부러웠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청년시절 꿈꾸고 소망하던 일을 책을 출간해 이루어냈다는 점에 대한 소소한 질투 때문이고, 둘째는 서경식 선생과 김석범 선생에 대한 애정을 통해 드러나는 우정과 연대의 마음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순수한 문학적 사랑의 열정과 타자를 환대하는 우정의 마음은 돈 몇 푼의 교환의 논리로도 살 수 없는 귀한 순수 증여의 표식이다. 이러니 어떻게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작은 질투도 넉넉한 사랑의 품으로 이해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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