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역할과 아라크네의 거미
-오창은 평론집 《나눔의 그늘에 스며들다》 (2017)를 읽고
“인간은 어떤 계기를 만나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게 되면, 바로 그것에서 자기만의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 성찰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소설작품들이고, 시 작품들이며, 그 대화를 매개해주는 것이 문학비평이기를 희망합니다. 문학은 그늘을 향한 응시고, 텍스트를 매개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물음이면서,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문학은 텍스트를 매개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계기와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나눔의 그늘에 스며들다』, 8면.)
오창은 선생의 평론집 서문에 적혀있는 인용은 저서 전체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문학은 그늘을 향한 응시고, 텍스트를 매개로 스스로에게 질문한 것”이라는 저자의 인식은 당위적이고 자연스럽다. 문학이 현실의 표면이 아니라 그것을 응시하는 주체의 내면적 성찰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글쓰기는 곧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학의 역할이 완료되는 것일까. 이에 관해 선생은 한 가지 개념을 더 제안하고 있다.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물음”으로 압축되어 표현된 보편적인 우리 삶에 대한 현실인식의 필요성이다.
문학 작품이 세계 내에서 개별자로 존재하는 개인의 내면에 대해 발화할지라도, 엄연히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적 조건에 가로놓여있다면, 문학은 작가의 개인적인 발화이자 사회적 발화로서 두 가지 목소리의 겹침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두 목소리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분열하는 그래서 서로에게 침입하고 간섭하며 대화하는 어떤 운동을 내포한 문학적 영역의 표현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선생이 말하는 “사적인 것을 통해 공적인 것을 재구성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139면.)이란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짐작한다.
다만 겹침의 무늬가 현실의 도상(圖像)으로서 문학 작품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금의 현실을 해명하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21세기 우리의 문학의 현실은 몇몇의 이념들로 설명하고 해명하기에 복잡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작품이 과연 자신의 내면과 현실의 조건을 뚫고 나아가서 어떤 창조성의 영역을 벌여놓는가에 있다. 생각하면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베케트까지 다 그 창조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나아간 작가들이 아닌가.
제임스 조이스가 더블린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외된 풍경을, 카프카가 벌레가 된 자신을 바라보며 변신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그리고 베케트가 희망의 기미가 없는 나날들의 황혼을 말하며 그려낸 현실은 우리 내면의 진실에 대한 차가운 응시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작품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라면, 한 작품의 내적 진실은 우리의 현실의 명민한 조감도일 수밖에 없다.
한국문학이 앞으로 만들어갈 그 창조성의 영역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것이고, 하나의 방향으로 하나의 모습으로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문학비평의 역할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도 참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고 나에게 답이 없다. 현상적으로 판단하면 비평의 영역은 사후적이기 쉽다. 그래서 누군가 공들여 작성한 작품에 대한 나름의 해설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비평의 소임은 그것으로 끝인가.
이에 관해 선생은 “문학은 텍스트를 매개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계기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라고 답해주고 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텍스트를 통해 우리가 망각하거나 은폐하고 있던 현재의 진실을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더 이야기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럼 만남을 어떻게 주선할 것인가라는 문제 말이다.
지도하는 비평은 작품을 초월해 평론가의 관점이 지배적일 수 있고, 반대로 해설하는 비평은 작가의 의도를 재확인으로 끝나기 쉽다. 비평이 평론가의 의식적 오만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작가의 의도를 초월해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는 생산성을 가지려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 난 그것들에 관심이 간다. 오만 없는 겸손한 비평 그러나 때로 용기 있는 비판도 함께 수행하여야 하는 비평의 길이란 생각해보면 실패가 약속된 길에 다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것, 패배가 약속되어 있더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운명이 아닐까.
철학자 질 들뢰즈는 말했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평론가는 작품을 만들고, 독자는 작품을 완성한다고 말이다. 작품을 만드는 평론가란 텍스트와 사랑에 빠진 아라크네(Arachne)의 거미일 수밖에 없다. 텍스트의 씨줄과 날줄 위에 올라타 위태롭게 매달려 그 씨줄과 날줄의 움직임에 온몸을 내어주고 감각하는 기쁨을 향유하는 자. 평론가의 첫 덕목이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