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Jan 06. 2021

우회로 없는 직언의 미학

- 정은경 평론집《길은 뒤에서 온다》(2017)

  “지난 10년 간 우리 문학담론에서 일었던 열정적 전투의 하나는 ‘해체’와 ‘탈’의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주체의 동일성 부정, 의미의 조각내기,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공격, 이성에 대한 육체와 감성의 반격, 탈주와 차이, 탈정치와 탈장르, 탈민족, 탈식민, 탈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토록 열정적으로 쪼개고 쪼개서 얻은 것, 열정적으로 도주해서 닿은 곳은? 분열된 자아, 부유하는 익명성, 무성격, 절대적으로 조우할 수 없는 ‘타자’들, 의미없는 의미들과 목적을 상실한 개념들.

  이러한 일련의 ‘해체’와 ‘포스트’가 동일성의 폭력에 대한 고발이었다면, 반동적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고,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분열과 타자, 익명, 무의식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에 불연된 ‘나’와 더불어, 무의식과 함께 세상과 삶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타자’와 소통할 수 없으며, 익명으로서 ‘나’와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자동인형의 반란>, 《길은 뒤에서 온다》, 71면.     


  종일 앉아서 정은경 선생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오후 저녁쯤 책장을 덮으며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우회로’였다. 정확히 말하면 선생의 글쓰기 방식에는 적당히 독자가 빠져나갈 우회로가 없다. 선생의 글은 작품에 내포한 문제의식을 정확히 응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개념화해 독자들에게 그 의도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대체로 정은경 선생은 우회로 대신 직언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문제를 앞에 두고 돌아가기 보다는 정면으로 앞질러 가는 방식이라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작품들이 그 의도를 따라 기립하듯이 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덕분에 글이 쓸데없는 수사가 없고 시원스럽게 읽힌다. 이러한 점은 정은경 선생의 개인적 성격이거나 문체적 스타일인 것 같다.


  21세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에 얼마나 잔혹하고 참혹한지 알고 있다. 내가 누리는 잠깐의 휴식시간 조차 누군가의 노동이 집적된 결과라는 점을 떠올리면 과연 편히 잠이라도 잘 수 있을까? 밥이 넘어갈까? 진짜 눈물의 공포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진실이 우리가 생각하듯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라캉이 말했듯 우리는 진실을 우회하기 위해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 환상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 출몰하는 실재는 추악하고 냄새나는 것 유령과 괴물의 모습이기 쉽다. 최근의 문학 작품들이나 대중문학 작품에 출현하는 괴물 혹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그리고 그로테스크의 미학들은 일종의 자본주의 현실의 실재적 중핵을 우회하는 판타지이기 쉽다.


  정은경 선생이 다루는 작품들도, 근대화로 인해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적 징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추상화와 알레고리의 방식 그리고 구체적인 시간이 지워진 상황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이야기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담지하고 있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람이란 원래 비겁한 동물이라서 자신을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비참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작은 희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정은경 선생은 어설픈 희망을 던져줌으로써 독자들을 봐주지 않는다. 이 세상이 디스토피아라는 것, 자본주의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물화된 자동인형 그 자체라는 것을 이야기할 뿐이다. 더 심각한 진실은 그 원인이 나, 너, 우리 모두와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위의 인용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해체’와 ‘포스트’ 담론의 영향 아래 있으며 그것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포스트 담론이 현실을 재인식하는 반성적 성찰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 현실에 대한 회의주의와 비관주의를 다시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분열과 타자, 익명, 무의식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절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포스트 담론이 우리의 현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면 이미 포스트 담론의 세례를 받은 현실에서 마냥 과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지도 않은가. 그렇다면 이후 우리 현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보지만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아직 찾지 못하겠다. 결국 살아보는 수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비평의 역할과 아라크네의 거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