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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Apr 22. 2021

파국, 유토피아, 광신과 혁명

-2021년 4월 22일

  최근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세계의 소설론과 미학의 쟁점들》 (창비, 2015)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루카치와 싸르트르를 비롯해 다수 문예이론가들의 소설이론을 둘러싼 쟁점들을 소개하고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구성 방식은 각각의 필자들이 한 명의 문예 이론가를 맡아서 그들의 문학 이론을 소개하고 쟁점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의 글마다 개성과 차이들이 분명하다. 친절한 소개와 각 이론가들의 이론에 대한 해제적 성격이 강한 글도 있고, 보다 넒은 문화유형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글도 있다.    

  

  이러한 다수 저자들의 글쓰기가 지닌 개성은 대상과 글쓴이 사이의 거리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고, 그들이 어떠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느냐 그리고 자기 실존적 삶의 토대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많은 영감을 받았던 글은 김수환 선생의 「“책에 따라 살기” -유리 로뜨만의 문화유형론과 ‘러시아’라는 유령에 관하여」라는 글이다.      


  석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던 시절 유리 로뜨만의 『기호계』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은 한창 한국에서 문화연구라는 학문 분야가 주목받고 있을 무렵에 호기심으로 읽었던 책이다. 당시 공부가 부족하고 어렸던 나는 단순히 이 책이 ‘문화’라는 것을 기호학적으로 해석하고 유형화하고 있는 글이라고 이해했고 박사 과정에 입학한 이후로는 잊고 지내던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을 크게 오독했다는 것을 다시 김수환 선생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간략히 요령껏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에서 문학은 “문학 이상의 문학”의 위상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데, “문학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더한 어떤 것”이어야 함을 뜻한다. 문학은 글쓰기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변혁과 민족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미래를 향한 예언이어야 한다. 즉 그들에게 책의 이념과 현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책은 현실을 구축하는 원칙이다. 이러한 문학론은 이원적 모델로 설명할 수 있은데, 이러한 이원적 모델은 중간항이 부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서 중간항은 일종의 중립지대로 양쪽의 극단적인 입장이 타협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 문화는 이러한 중간항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전 세계에 존재하던 기성의 가치들을 파괴하고 완전한 단절을 선택한다. 삼원적 체계가 중간항을 설정함으로써 기성의 가치들을 파괴하면서도 다시 계승하는 방식이라면, 이원적 체계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 절대적 폐허를 선택한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문화의 이원적 구조는 타협과 절충을 거부하는 그들이 문화가 가지고 있는 원칙주의적 성격을 말해주고, 그들에게 이념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바로 이념과 현실의 이원구조는 문학에서는 텍스트와 삶의 이원항과 일치한다. 여기에 러시아적 태도가 존재하고, 그들은 고의적으로 삶과 예술의 경계를 가르지 않는다. 즉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따라 살기’란 이러한 러시아의 이원적 모델에 토대한다.     


  이러한 이원구조의 산물인 ‘책을 따라 살기’라는 테제가 최근 다시 귀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근대 문학의 종언론의 진원지인 일본에서 사사키 아타루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다시 언급되며, “책에 따라 살기”라는 테제의 이원적 모델이 귀환하고 있다. 그리고 이원론적 모델을 구성하는 “극단적 원칙주의”와 “종말론적 유토피아 주의”적 태도가 현대 문예론에서는 각각 문강형준이나 복도훈 등의 파국론과 지젝 ․ 바디우의 유토피아 발명이라는 테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파국론은 간단히 말해 종말의 감수성이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기존 질서와의 급진적 단절을 요청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개념을 경유한 정치적 기획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지젝과 바디우를 통해서는 절충적 실용주의를 거부하고 강경하고 고집스러운 윤리학인 안티고네와 바울을 재소환하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의 발명이라는 관점이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 이 사이에 존재하는 광기의 주체는 이제 어떤 원칙과 믿음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신념의 윤리를 지닌 존재로 귀환한다.       


  김수환 선생의 고민은 과거 러시아의 이원적 모델의 유령이 다시 현대 사회에 귀환하는 모습을 보며, 광신의 비타협주의적 태도가 지닌 우려와 그럼에도 광신 없는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사이의 당혹에 있다. 이러한 당혹감 속에서 김수환 선생은 유리 로뜨만의 『문화와 폭발』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단언하기에는 로뜨만의 입장이 여전히 조심스럽다. 러시아문화의 근간에 뿌리박힌 이원적 정신구조의 흔적과 그 영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는, 문화의 폭발적 전개에 뒤따르는 현실적 위험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폭발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과 부정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폭발은 복잡하고 양가적인 가치다. 이원적 문화 맥락에 그것이 가져 올 수 있는 위험에 민감하지만 그럼에도 로뜨만은 폭발적 국면을 사랑한다. 그런 파열의 순간들에서만 잠재성의 직접적이고 풍부한 증식이 가능해진다. 이 잠재성들은 아직 조직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점진적 과정들의 실용적이고 예측 가능한 산물도 아니다. 약간의 민족적 자긍심을 곁들여, 로뜨만은 이원적 환경이 부서지기 쉽고 파국적이긴 하지만, 그에 본질적인 ‘심오한 위기’가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오기 쉽다고 인정한다.” (129면)     


  간단히 말해 문화 내부에 폭발(파국)이 없다면 문화란 생성하는 메커니즘(유토피아의 재발명)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감옥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폭발이 존재할 때 문화 장 내부에 어떤 생성의 계기들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김수환 선생의 글은 부족한 내가 큰 틀에서 현대 이론의 흐름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주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유리 로뜨만의 『문화와 폭발』을 언급하며, 이런저런 광신의 위험에도 문화적 장 내부에 폭발의 계기가 없다면 새로운 생성의 운동이 발생할 수 없다는 언급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폭발의 잠재성에 대한 우려를 먼저 떠올리는 나의 견고한 무의식적 보수성은 저 광신의 정치와 손쉬운 혁명의 유토피아주의가 이 시대의 지성적 문화적 상품으로 보이게 한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책에 따라 살기” 위해 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모두들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볼지 상상해본다. 저 진지함을 다들 다큐가 아니라 유머로 받지 않을까? 티셔츠에 프린트가 되어 돌아다니는 체게바라의 얼굴처럼 혁명이란 상품이 우리에게 현실을 견디게 하는 다른 방식의 마취제로 기능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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