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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y 28. 2022

목민의 세계와 자산의 세계 사이에서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2019)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는 아름다운 바다와 흑산의 풍경을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화면 속에 담아놓았다. 흑백 화면이기에 강렬한 질감을 지닌 바다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한 척의 배에 몸을 싣고 유배지 흑산으로 귀양을 온 정약전과 창대의 순탄하지 않은 만남은 두 남자 사이의 갈등을 예고하지만 둘 사이의 교감은 이 작품에 관객들이 몰입하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자산어보>를 구상하는 정약전을 돕는 조건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고 정약전에게 성리학을 배워가는 창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류도감을 만들고자 하는 스승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정약전의 가르침을 통해 창대의 학문이 점차 깊어질수록 흑산의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내로 성장한다. 이처럼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창대 사이의 우정을 중요한 내러티브의 요소로 활용하고 있지만 필자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정약용과 정약전 사이의 대결이다.


  영화 속에서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대비되는 세계가 바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목민관이 관리로서 행하여야 하는 지침이 담긴 서책인데, 이 책에서 목민관은 어디까지나 임금을 대신하는 자이다. 즉, <목민심서>의 내용이 조선이라는 세계를 개선하는 데 유용한 지침서일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주자의 성리학적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인 것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여전히 백성 위에서 말을 하는 왕이 존재하고, 그를 대신해 백성들에게 말을 전하는 관료들이 존재한다. 정약용이 꿈꾸는 나라는 여전히 성리학적 질서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반면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은 묻는다. 목민관의 성리학적 윤리가 과연 헐벗은 백성들의 곤궁을 해결할 수 있냐고. 가장 하찮은 곳에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를 밝혀 백성들이 그 지식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냐고 말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객관적인 사물의 세계이자 백성들의 실질적 삶의 고민을 해결하는 유물의 세계이며 왕과 관료가 없이 백성 스스로 자기 삶을 돌보는 '자기돌봄'의 세계이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정약전이 흑산의 사람들이 닭의 모이로 주던 짱둥어를 실제로 국으로 끓여먹게 함으로써 흑산의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있게 해주거나, 서양 사람들이 배에서 떨어뜨린 지구본을 이용해 어획량을 늘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로  예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바로 짱둥어를 끓여서 백성을 실제로 입히고 먹이는 원리이다.


  과연 만백성을 임금이 돌볼 수 있는가? 윤리적인 목민관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가? <자산어보>는 말한다. 아니라고. 백성이 머무는 모든 곳에 천 개의 눈과 귀가 있어도 임금은 임할 수 없으며,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왕이나 관료가 아니라 백성 그 스스로일 뿐이다. 어찌 백성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민중적 세계를 성리학의 질서가 지배하는 조선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에서 정약용이 유배에 풀려났지만 결국 정약전이 섬에서 죽음을 맞는 것은 그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창대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의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세계를 따르리라 말한다. 그러나 창대가 목도한 현실은 어떤가. 스스로 백성들을 돌보는 목민관이 되고자 하지만 배운 바를 실천할 수 없는 세계에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이를 낳았단 이유로 갓난아이의 군포를 내라는 관의 횡포에 스스로 자기의 양물을 자르는 백성의 고통도 창대는 구원하지 못했다. 부패한 관료들이 임금의 권위를 이용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하소연 할 수 없는 세계 내에서 양심 있는 관료 한 명이 혹은 무력한 지식인의 말이 현실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배운 바를 실천할 수 없는 지식인에게 남은 것이란 자기혐오와 우울이란 병에 밖에 더 있나.


  창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담긴 목민관의 윤리와 지침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 세계임을 목격하고 그는 다시 흑산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말미에 우도의 초가에서 죽은 정약전의 유작 <자산어보>를 들고 흑산으로 돌아가던 창대가 흑산을 자산이라고 지칭하자 흑백의 화면이 선명한 칼라 화면으로 뒤바뀐다. 이러한 화면의 변화는 창대의 미망이 사라지고 세계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정약전이 꿈꾸던 자산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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