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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Oct 10. 2022

운명을 움직이는 힘

-한재림 감독의 영화 <관상> (2013)

  18세기 골상학(Phrenology)이란 것이 출현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츠 요제프 갈이라는 의사에 의해 주창된 골상학은 두개골의 형상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적 능력은 대뇌 피질의 각 부위에 분배되어 있고 그것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하므로 두개골의 형상을 자세히 살피면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론이 황당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근대 신경생리학과 해부학적인 지식의 발전에 기초한다. 


  철학자 헤겔은 두개골을 통해 인간의 심리 즉,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웃었다. 그에게 인간의 정신은 이성을 통해 파악된 절대지에서 비롯하는 것이지 결코 두개골의 모양 따위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골상학이란 인간 정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근거로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신을 규명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러한 유사 과학에 따른 오류를 반복한다. 


  예컨대 삼국지연의를 보면 제갈량은 위연의 뒷머리가 튀어나온 것을 보고 훗날 자신의 주인을 배신할 상(相)이니 가까이 두지 말라고 유비에게 권한다. 그러나 인재를 소중히 여겼던 유비는 그 주장에 반대하고 그를 촉나라의 대장군으로 삼았다. 재미있는 것은 제갈량이 죽자 위연은 결국 촉나라를 배신했으며, 이러한 사태를 미리 대비한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위연은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촉나라의 대장군이었던 위연의 배신을 그가 지닌 반골(反骨)의 상(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촉나라를 배신한 결정적 이유는 끝까지 위연을 믿지 않았던 제갈량의 의심이다. 무엇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선택지는 배신밖에 없지 않은가. 삼국지연의에서 위연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골상의 생김이 아니라 바로 타자를 향한 수용과 믿음이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 


  영화 <관상>(2013)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고자 하는 수양대군과 단종을 보위하고자 하는 김종서 사이의 정치적 대결을 기본적인 축으로 한다. 단종을 보좌하기 위해 김종서는 관상쟁이 내경을 입궐시켜 궁궐 내 인물들의 상(相)을 보도록 하고, 이를 통해 충신과 간신을 구별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 내경은 자신의 출중한 실력을 통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궁궐 내 간신들의 정체를 밝혀내지만 이 과정에서 서서히 김종서 일파가 사대부들의 신임을 잃고 몰락하게 되는 징후를 발견하게 된다. 


  개인이 지닌 능력과 인선에 있어서 합리적인 절차보다 관상에 의존하게 될 때 김종서 일파는 점차 합리성과 정치력의 부재를 노출한다. 물론 김종서는 문종의 부탁에 따라 수양대군으로부터 단종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 명분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내정을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서 진행하지 못할 때 스스로 몰락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는 누구나 납득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차적 과정과 합리적 선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일방적인 독선이 되어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관상가인 내경의 능력이 발휘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김종서 일파는 몰락하게 된다. 


  김종서가 내경의 역술에 의지해 자신의 정치를 하고 있을 때, 수양대군은 왕이 되고 싶은 욕망과 단종이라는 조카를 살해하는 것 사이에서 번민한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바로 폐위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알현하고 독침으로 살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포기할 때 수양대군의 갈등하는 내면이 드러난다. 바로 영화에서 행동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관상>의 진짜 주인공은 수양대군이다. 우리는 어떠한 계기로 수양대군이 역모를 통해 단종을 폐위시켜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지 내경의 관점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수양대군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조카를 폐위시킨 삼촌이라는 죄책감 속에서 번민한다. 하지만 내경의 계책에 의해 수양대군의 이마에 세 개의 반점이 새겨지는 순간 그의 욕망은 외적으로 드러나고 드라마는 파국으로 향한다. 영화에서 수양대군의 이마에 새겨진 세 개의 반점은 그가 번민을 끝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역모를 일으키게 될 운명에 휩싸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수양대군의 이마에 세 개의 반점이 찍히며 반골(反骨)의 상(相)으로 뒤바뀐 순간 단종은 드디어 수양대군을 자신의 삼촌이 아니라 정치적 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김종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삼촌의 배신을 부정하던 단종이 수양대군의 상을 보고 그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수양대군의 발목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욕망의 고삐는 풀리고 만다. 이제 둘 사이에 타협은 불가능하며 이제 서로가 살기 위해서 서로를 베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과연 세 개의 반점이 수양대군과 단종의 운명을 결정한 것일까? 관상이라는 역술의 논리가 역사적 사건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설정이 인간의 욕망과 믿음의 문제를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수양대군을 향한 단종의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시작되는 파국일 것이다. 즉, 수양대군을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던 단종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수양대군이 자신의 죄책감을 마침내 떨쳐내는 순간 사건의 계기는 교차하며 단종의 폐위와 수양대군의 역모라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골상학으로 시작해 인간의 운명이란 관상이 아니라 바로 타자를 향한 믿음에 달렸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관상>은 이미 주어진 자신의 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 상(相)을 움직이는 것은 주체와 타자들 사이에 보이지 많은 무수한 관계들의 역학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역학이 만들어낸 산물이 역사이다. 영화의 말미에 내경이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한명회에게 “난 사람의 관상만 보았지, 시대를 보진 못했소.”라고 말할 때, 인간의 운명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역사,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을 연주하는 관계들의 힘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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