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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r 01. 2016

영화가 된 詩, 정동의 드라마

-이준익 감독의 <동주> (201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서시(序詩) 중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 (2016)가 개봉했다. 기사에 따르면 현재 60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고 한다. 영화 <동주>가 이뤄낸 성과는 고질적인 병폐인 스크린 독점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스펙터클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닌 저예산 영화를 보기 위해 60만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았다는 것은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무엇이 영화 <동주>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까?

   필자는 영화 <동주>를 보기 전까지 우려의 감정이 먼저 앞섰다. 일제강점기라는 가까운 근대 시기를 다루는 영화들의 경우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대상과의 객관적인 거리가 사라질 경우 작품들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관객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영화는 일종의 감상주의에 머물게 된다. 이미 알려졌듯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은 시인 윤동주의 삶과 엄혹했던 세상을 배경으로 이 작품이 무엇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흑백 화면으로 연출된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자연을 닮은 천연색과 달리 흑백의 화면은 그것이 구성된 이미지임을 스스로 노출한다. 그래서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이끈다. 관객의 시선과 대상은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겨나고 영화는 스스로의 본질로 되돌아간다. 영화가 원래 흑백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우리가 영화에서 보게 되는 천연색의 세계야 말로 환상이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오늘 날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낮에 꾸는 꿈이다.

   이 영화는 동주에 관한 전기적 작품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시와 이미지가 빚어내는 정동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 <동주>는 어떤 거대한 서사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동주는 이종사촌인 몽규를 선망하는 한편 세계와 불화하며 고뇌하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는 엄혹한 세상에서 시를 통해 자신을 숨기는 일과 어떠한 차별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드는 몽규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 내면의 고뇌가 동주의 시와 일상 풍경의 이미지들이 겹쳐져 형언하기 힘든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흑백 화면 너머 점등의 불빛 아래로 타는 듯이 흩어지는 먼지의 이미지가 주는 정서적 여백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잡힐 것 같지만 새어나가는 빈 공허에 가깝다. 이 같은 이미지들이 동주의 시와 어우러진다.


   내레이션을 통해 퍼지는 동주의 시와 정서적 여백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 결합하면서 관객들은 정동의 운동에 사로잡힌다. 동주가 세계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토로하는 수채화 같은 시 그리고 도망칠 곳이 없이 창틀 사이로 보이는 별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동주의 야위어 가는 얼굴이 관객들의 공감을 불어온다. 더불어 기타 선율로 이루어진 잔잔한 멜로디가 들려오면 그 슬픔의 정서는 극대화된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를 통해 윤동주의 삶에 관해 관객들에게 설명하기보다 그가 현실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 그리고 고뇌의 실재를 함께 공유하기 바랐던 것 같다. 관객의 반응으로 보아 그 의도가 일정 부분 성공한 듯하다.

   영화 <동주>를 보면서 몽규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동주는 수동적 주인공이기 때문에 극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건을 일으켜줄 인물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몽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규가 동주에게 어떤 일을 제안하고 사건을 일으키면 그것을 동주가 뒤에서 바라보고 느끼는 과정이 반복된다. 사실상 영화에서 몽규는 동주의 다른 자아이다. 몽규가 이성과 행동을 의미한다면 동주는 감성과 내면을 대변한다. 하지만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 있으며 하나의 ‘혁명’을 바라본다. 영화의 후반부에 동주와 몽규가 일본인 형사의 질문에 번갈아가며 대답하는 연출은 그들이 하나의 주체임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몽규가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말하며 혁명을 향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때이다. 일제강점기 어두운 현실에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혁명을 말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는 몽규의 모습에서 동주가 느끼는 선망과 부끄러움을 공감하게 된다. 현재라고 다를까? '마르크스'와 '바쿠닌' 그리고 '크로포트킨'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에 담으면 경찰서에 끌려가 사상 검증을 해야 하는 시대는 과거인가? 이 지점에서 동주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단순히 동주 개인의 것만이 아니게 된다.  

   또한 동주와 몽규가 자취방에서 문예지를 만들다가 말다툼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데, 여기서 동주는 몽규가 시를 사상의 도구쯤으로 여긴다고 오해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시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동주는 시가 사람을 바꾸고 그들이 모여서 새로운 세상을 불러온다고 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동주의 생각은 이상일 뿐일까? 몽규는 동주에게 이렇게 묻는다. 문학이 언제 그런 일을 해냈는가? 몽규의 질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과연 문학이란 무기력한 것인가, 사람은커녕 세상 무엇도 바꾸지 못하는 말장난은 아닌가. 이에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말을 빌려 하나의 대답을 내어놓는다. 영화에서 동주가 말하는 ‘문학’은 몽규와는 다른 방식의 ‘혁명’이라고, 문학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저항이기에 그것은 영원히 끝없는 기나긴 혁명의 다른 이름이라고.  

   영화에서 동주가 만난 정지용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심하게 던지는 이 말은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동주를 향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내면에 화두를 던져주는 것일까?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 활보하는 시대에 완성되지 못한 청춘에 관해 말하는 영화 <동주>를 보는 것은 오늘 날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끝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내기까지 조선어로 시를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시대에 조선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사모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주의 시는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어두운 세계를 단단히 견디었으며 이렇게 영화가 된 시의 형태로 만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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