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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r 02. 2016

진실이라는 공포

-이윤정 감독의 <나를 잊지 말아요> (2016)

  이윤정 감독의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는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는 과정을 다룬 미스터리물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멜로 장르의 문법을 취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아픔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말이다. 

  교통사고로 지난 십 년의 기억이 지워져버린 사람의 내면은 어떠할까? 담담한 목소리로 전달되는 석원의 내레이션(narration)을 통해 익숙한 일상은 서서히 낯선 풍경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진영이 석원을 찾아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동차 운전을 부탁하는 장면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다. 우연한 만남 이후 석원이 진영에게 청혼하는 순간까지는 둘의 사랑은 영원할 것 같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불행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영화는 둘 사이에 비밀이 있음을 관객들에게 암시해준다. 석원은 창고를 정리하다가 책을 떨어뜨린다. 그는 책갈피 속에서 결혼식 드레스를 입은 진영의 사진을 발견한다. 이 순간 우리는 “석원의 과거와 진영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도달한다. 이제 영화는 둘 사이의 멜로가 아니라 비밀로 초점이 옮겨진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신부복을 입은 낯선 남자가 진영을 찾아온다. 당황한 표정으로 진영이 손톱깎이를 사오겠다고 거짓말하는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영은 석원에게 그가 단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진영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실은 석원이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있던 여인 보영을 수소문 끝에 만나며 밝혀진다. 석원과 진영은 오래전 결혼한 사이며 그의 실수로 교통사고가 일어나 아들 동운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의 충격으로 석원은 십 개월 전부터 기억을 상실한 상태가 되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얼마 전에야 퇴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석원은 죄책감에 휩싸이고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기억을 상실한다. 즉 고통 속에 사느니 자신을 망각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석원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회피해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사고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고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신을 ‘연기’한 셈이다. 이제 석원은 육체가 살아있지만 주체를 상실한 유령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결코 ‘진실’은 아름답거나 정의로운 것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진실은 언제나 치명적이며 주체를 위협할 정도로 죽음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어떤 사건이 의식 아래 억압되는 이유는 그것이 주체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불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억압되지 않는다. 주체의 주변을 배회하다가 일상으로 회귀한다. 책갈피 속에서 발견한 사진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갑작스러운 우울이나 혹은 피로감을 동반하며 말이다.   

  이제 진영과 석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기억의 장벽이 가로놓인다. 어쩌면 그 장벽은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의 사랑은 조우가 불가능한 실패 속에서 잠재적 사건으로 남겨질 것이다. 석원이 다시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진영이 방황하는 석원을 떠나지 못한다. 마치 항성(恒星)처럼 그의 곁을 배회하며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진영의 존재 자체가 석원이 망각하고 있는 기억의 파편이라는 점에서 그의 과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고 다시 회귀할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 이것은 석원의 목숨이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결코 조우할 수 없는 사랑임에도 그것의 실패를 반복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실패를 반복한다고 상황이 나아질지 알 수 없다. 주어진 어떤 상황도 그들이 행복해 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방황하는 석원에게 진영이 손을 내미는 순간 일말의 안도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잊고 있지만 삶을 현실에서 지탱하게 하는 힘은 복잡한 의미들이 아니라 나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누군가와의 눈맞춤이란 사실을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 이 글은 3월 1일 <고대신문> 지면에 실린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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