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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Apr 05. 2016

괴물이 된 영화

-모홍진 감독의 <널 기다리며> (2016)

   모홍진 감독의 <널 기다리며> (2016)을 지배하고 있는 아포리즘은 니체의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문장이다. 여기서 ‘괴물’이라는 상징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살인마 기범, 두 번째 기범을 합법적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부정한 사회, 세 번째 복수를 꿈꾸는 자의 욕망이다. 영화는 런닝타임 내내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희주의 복수가 지닌 당위를 관객에게 설득하고자 노력한다. 가령 희주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아포리즘을 언급하며 바로 “신이 죽었기 때문에 괴물은 탄생한다”말과 함께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장면과 같은 것들이다. 덕분에 영화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다가오지만 관객의 상상력이 더 뻗어나갈 여지를 닫아버린다. 이것은 영화 <널 기다리며>가 중반 이후 급격히 힘을 잃게 되는 이유이며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과잉된 아포리즘에서 더 나아가서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순간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희주가 대영을 위로하며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한가지인 것 같아요.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며 관객들의 윤리를 문제 삼을 때 작품에 대한 기대는 상실되어버린다. 왜 굳이 희주는 대영에게 앞서의 대사를 말해야 하는 것일까?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의도와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상을 살아가는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하고자 했던 의도로 보이지만 과연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가 ‘극(劇)’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언어적 설명이 아니라 ‘행위’와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설득해야 하며 스스로 느끼고 성찰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영화는 극(劇)이지 교과서가 아니다.

   또한 순수와 광기를 오가는 희주 캐릭터는 어디선가 다른 영화에서 접해보았던 느낌이다. 예컨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2010)에서 등장하는 수현의 캐릭터와 비교할 수 있다. 이 작품도 살인마에게 아내를 잃은 수현의 복수를 다루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끌어가지 않는다. 수현이 살인마에게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 영화는 폭력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로 전환된다.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살인마와 수현의 차이가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처럼 문제는 영화가 말하고 싶은 윤리의식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으로 삼도록 이끄는 일이다.  

   그렇다면 영화 <널 기다리며>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서 희주에 대해서 관객이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살인마에게 살해당했고, 직장 동료인 대영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으며, 살인마에게 복수하기를 계획하는 소녀라는 사실 정도이다. 다만 그녀가 살아가는 지하실 단칸방의 벽면을 채우고 있는 노란 메모지나 방바닥 전체에 스크랩되어 있는 사건 자료들이 만들어내는 미장센이 분열된 희주의 내면을 암시해줄 뿐이다. 영화 <널 기다리며>는 희주에 대한 관객들의 정서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복수의 당위성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녀는 연민의 대상으로 그려질 뿐 다른 변화의 가능성을 찾기 힘들다. 

   영화의 엔딩에서 희주의 복수가 범기의 범죄를 증명하기 위한 자살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멜랑콜리한 정서를 유발시키지만 동시에 작위적 결말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한다. 순수하지만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녀가 자살을 통해서 살인마에게 복수한다는 것만큼 연민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희주는 부조리한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양으로 처리되고 윤리적 책임은 선함을 가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객에게 돌려진다. 이 같은 안일한 결말은 불편하다. 스릴러 장르의 핵심이 영화 속 이미지들의 배치가 관객의 내면에 어떻게 불안감을 조성할 것인가에 달려있다면, 영화 <널 기다리며>는 스릴러로써 실패했다. 익숙한 플롯의 구조와 캐릭터 그리고 과도한 아포리즘으로 인한 작위적인 결말은 보기 안타까울 뿐이다.  


*이 글은 <고대신문>에 연재된 글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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