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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y 19. 2016

'숨은 신'의 역설에 관하여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 (2016)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은 작품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누가복음 24장 37-39절을 인용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앞서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예수의 언어와 태도를 통해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의 당황스러움이 잘 묻어난다는 점이다. 그럼 왜 영화는 누가복음의 성경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오프닝 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제시된 성경 구절은 영화 전체를 압축해주는 아포리즘이다. 제시된 성경 구절의 모티프를 통해 그것과 관련한 텍스트를 보여주고 새로운 해석의 판본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 세계 내의 한계에서 주체를 구성하고 세계는 물자체(物自體)로 남겨진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 내의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한계를 넘어 세계를 궁구할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예수(신)의 부활은 세계 질서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사건’이 된다. 통상적으로 인간의 확신과 믿음은 자신이 보고 판단한 경험의 일관성과 동일성 속에서 구성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개인의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초월적 존재나 사건을 인정하고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관련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신’을 ‘부정’하면서도 잠자리에서 ‘죽음’의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또한 ‘믿음’을 가진 자는 자신의 ‘믿음’이 ‘맹목’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수 있을지 우리는 묻게 된다.

  영화 <곡성(哭聲)>은 바로 이러한 두 태도 사이를 파고들어서 관객에게 ‘미끼’를 던진다. 그 ‘미끼’는 동네에서 반복되는 살인 사건과 죽음이다. 작품을 관람하는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반복된다. 이 끝없는 죽음의 반복은 공포로 느껴지기보다 알 수 없는 짜증스러움과 불안을 불러온다. 도대체가 죽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답답함이 일종의 ‘무력(無力)’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타이틀이 ‘곡성(哭聲)’ 즉, ‘울부짖음’인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분명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어떠한 죽음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우연적이고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죽음들은 일종의 ‘증상’과 ‘흔적’만 남길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죽음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 일종의 ‘표지’에 가깝다. 작품에서 죽음은 모호하고 잡히지 않는 불안한 이미지로 관객을 현혹한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괴기스러운 사건과 현상이 일어나고 귀신들린 딸 효진을 살리려는 종구의 노력이 좌절될 때마다 그의 이성은 무력해지고 외지인을 향한 광적인 폭력이 대신한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한 장면에서 보여주듯 종구가 귀신들린 효진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외지인을 함부로 의심하고 그 집의 개를 잡아 죽이는 행동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종구의 행동은 근거 없는 맹목이며 확신이다. (종구가 외지인을 살해하기로 한 근거라고 해봐야 일광의 말뿐이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하면 딸 효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구의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종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효진을 살리기 위해 무당 일광을 찾는다. 그리고 일광은 종구에게 외지인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악령’이라고 설명한다. 의심이 확신이 된다. 그런데 과연 그의 말이 진실인가? 이후 영화는 일광이 굿을 하는 장면과 외지인이 굿을 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다. 이 장면은 외지인이 일광의 말처럼 ‘악령’이 아니라 일광과 같은 ‘무속인’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때 외지인이 ‘악령’일 것이라는 확신에 ‘의심’이 끼어든다. 외지인은 ‘악령’인가, 아니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마을에 숨어든 일본 국적의 ‘무속인’인가. 결과적으로 종구는 외지인을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한다. 이때까지 불안하기만 하다. 혹시 그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종구의 딸 효진이 씻은 듯이 병이 낫는다. 그렇다면 외지인은 일광의 말처럼 진짜 ‘악령’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 때 다시 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원인 모를 이유로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종구를 비웃는다. 이 조롱의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영화의 결말에 일광의 전화가 종구에게 걸려온다. 일광은 외지인은 ‘악령’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무속인이며 모든 일의 배후에는 종구의 조력자인 무명의 짓이라고 말한다. 종구는 일광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다가 ‘무명’과 마주친다. 무명은 종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외지인이 ‘악령’이며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면 그의 가족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을 것이라 말한다. 이때 영화는 동시에 죽어있던 외지인이 살아있음을 관객들에게 알려주고 동굴에서 면벽기도 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종구의 선택만이 남는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영화에서 종구가 무명을 의심하고 믿음을 배반하는 모티프는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하는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자 베드로는 처음에 그 말을 부정하지만 막상 위기에 처하자 그 사실을 잊고 예수의 말처럼 배신하게 된다. 하지만 베드로의 배신은 신의 의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수의 예언이 틀린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종구가 무명의 말을 믿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가족들이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것 또한 다른 반전의 가능성을 찾기 힘들다. 영화의 카메라는 이미 종구의 운명을 결정한 부재하는 신의 시선이고 만약 그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서사는 구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구의 의심은 필연이고 그에게 찾아온 파국은 피할 수 없다.  

  영화 <곡성(哭聲)>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스스로의 믿음을 의심하도록 미끼를 던진다. 외지인이 ‘악령’인가 싶으면 ‘무속인’처럼 보이고, 무명은 ‘수호령’인가 싶으면 ‘악령’처럼 보인다. 일광의 말에 종구는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기도 하고 다시 믿음을 의심으로 채우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문법적으로 보면 ‘부정문’의 형식이다. 서사가 진행되고 어떠한 종류의 ‘긍정’이 생기면 다시 그것을 ‘부정’하는 일이 반복한다. 무엇을 긍정하고 확신하는 순간 바로 그것은 부정의 대상이 된다. 교묘한 교차 속에서 자신의 경험적 한계에 갇혀있는 인간 주체의 불완전성이 누설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영화의 오프닝과 일종의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는 결말이다. 일종의 스포일러이지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기에 글을 이어가도록 한다.

  영화는 결말에 외지인이 ‘악령’이었고 일광은 악령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악령은 사탄의 모습으로 변신해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인간들에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한다.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라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라며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필자는 바로 이 부분에 영화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영화는 오프닝의 복음을 자기 방식으로 비튼다. 바로 신을 향한 믿음은 그 믿음이 부정하는 대상을 긍정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의심이 얼마나 허약하고 나약한지 보여주면서도 오히려 비극을 불러오는 대상에 대한 인정이 세계에 부재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속에서 신은 부재한 적이 없다. 바로 그 잔혹하고 괴기한 죽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존재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력 속에 자신의 비극적 삶을 인정하고 세계의 모순을 수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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