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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l 04. 2016

존재의 숲

-코지마 마사유키 감독의 <피아노의 숲> (2015)

 때로 운명처럼 다가오는 끌림이 있다. 그것은 당신 곁의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우연히 읽게 된 문장일 수도 있고 출근길에 문을 열고 나오면 느껴지는 아침 공기의 낯선 차가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갑자기 어떤 마주침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매혹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그것은 어떠한 의도 없이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도래한다. 우연의 얼굴로 다가와 나에게 의미론적 사건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이 내면에 자리를 잡고 무엇인가 변화를 생성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 대상은 내 삶의 부분으로 존재할 것이다. 마치 바람둥이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서 역설적으로 뭇 연인들에게서 사랑을 집요하게 탐색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재는 가시성의 영역을 초과한다고. 간단히 말해서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 <피아노의 숲> (2015)은 두 소년의 성장담이기도 하고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자라난 두 소년이 음악을 매개로 각자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는 슈헤이가 여름날 시골에서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슈헤이가 내레이션과 함께 숲의 경계를 넘을 때 어디선가 피아노의 선율이 들려온다. 이것은 이후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어디까지나 슈헤이의 눈으로 해석된 세계라는 암시이다.  

  숲에 버려진 피아노,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피아노의 주변을 맴도는 아지노 선생, 그리고 피아노가 선택한 천재 피아니스트 카이라는 존재는 환상적인 매력으로 가득한 캐릭터들이다. 이런 환상적인 인물들과 함께 슈헤이가 과거를 회상하며 숲이라는 공간 속에서 보고자 한 것, 기억해내고자 하는 것은 카이라는 친구에 대한 우정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결국 현재의 현실에서 망각하거나 상실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것이 감독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작품에서 슈헤이와 카이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카이는 천방지축에 반항심으로 가득한 소년기를 보내고 있으며 유일한 친구는 숲의 버려진 피아노이다. 카이의 반항심은 유복하지 못한 환경 속에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생긴 방어기제로 보인다. 하지만 슈헤이가 같은 학급의 친구들의 장난으로 봉변에 처할 위기에서 그를 도운 것을 보면 마냥 천방지축은 아니다. 학급 친구들과 언쟁 끝에 다툼이 일어나고 둘은 함께 피아노가 있는 숲으로 도망쳐온다. 카이는 피아노의 숲에서 슈헤이에게 처음 자신의 연주를 들려준다.  

  숲이라는 공간이 선사하는 자유로움,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실어서 연주하는 카이의 모습에 슈헤이는 감동한다. 그때까지 슈헤이는 카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자신에게 지니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작품에서 슈헤이의 장래희망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발견하게 된다. 슈헤이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이전에 먼저 음악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것이 현실 속의 ‘나’라는 존재를 의미화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버릇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해보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멀게는 직장 상사 그리고 가깝게는 부모의 기대 속에 우리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맡기고는 한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와 더불어 말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각하고 수많은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세계 속에서 실존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영화에서 카이는 매력적인 소년으로 등장한다. 숲과 다름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고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그러한 외면적인 조건들이 카이라는 존재를 설명해주는 전부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카이가 슈헤이와 맺고 있는 관계의 의미이다. 카이는 아지노 선생의 지도에 따라 쇼팽의 ‘미뉴에트 왈츠’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슈헤이가 피아노 연주를 위해서 시도했던 노력과 그리고 무수한 실패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천재적인 재능만으로 연주할 수 없는 쇼팽의 ‘미뉴에트 왈츠’를 아지노 선생의 지도 아래 배워가면서 슈헤이가 겪었을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다른 시공간에서 공유하게 된다. 카이가 쇼팽의 ‘미뉴에트 왈츠’를 통해 배운 것은 피아노 연주법이 아니라 슈헤이가 혼자서 감내해야 했었을 고독의 의미이다. 다른 시공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두 소년의 삶과 의미는 포개어진다.

  슈헤이에게 카이는 일종의 질문이다. 카이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카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꿈 이전에 먼저 음악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카이라는 존재는 슈헤이가 어느 여름날에 겪은 성장통의 다른 이름이다. 콩쿠르에서 자신이 입상을 했지만 사실 카이가 진정한 일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흘러나온 눈물은 ‘패배’가 아니라 슈헤이의 내면에 음악에 대한 ‘열망’이 깃드는 순간이다. 카이를 쫓아온 슈헤이가 아지노 선생에게 자신도 카이와 같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슈헤이가 드디어 자신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한 인간의 개체성은 자기 내부의 과잉과 결핍을 통해서 생성된다. 저마다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적 한계 속에서 이런저런 결핍들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결핍이란 열등함을 뜻하지 않는다. 차라리 삶의 형식이나 타자와의 관계 문제이고 각자의 삶이 지니는 고유한 색채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부재하거나 공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결핍은 우리를 욕망하게 하고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삶의 근거이다. 공백은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상상하게 하고 그 무한의 가능성이 차오르게 하는 잠재된 영역이다. 그 공간에 정주하다가 다시 탈주하는 비움의 운동 속에 어떤 불변하는 고정된 방향과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을 살아낸다고 하여도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아마추어라는 말이 있듯 어떻게 하나의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삶만이 존재하겠는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삶의 양태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슈헤이에게 카이는 결핍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다른 고유한 삶의 방식과 색채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열어준 타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 실존(實存)의 근거가 바로 외부의 타자에게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카이가 슈헤이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되고, 슈헤이는 카이를 통해 음악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자기 삶의 방향성을 구축하듯이 말이다.

  앞서 영화 <피아노의 숲>은 두 소년의 성장담이라고 말했다. 성장이라는 것이 육체적인 성장이라는 좁은 범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거듭남을 더불어 지시하는 것이리라. 성장은 다른 뜻으로 기존의 ‘나’와 다른 차이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스스로 차이화하는 개체의 존재 방식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변화한 것은 두 소년뿐만이 아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작품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공유한 무위의 공동체 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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