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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Nov 05. 2016

누구를 위한 절망인가?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 (2016)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를 관람한 이후 “누구를 위한 절망인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인공을 몰아붙이는 내러티브와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절망이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작품 속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몽타주들은 출구 없는 상황에 처한 도경의 절망적인 내면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세계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의 몸부림에 대해서 가학적일 만큼 집요하게 응시하던 카메라는 폭력의 배후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심하다. 점차 원인은 희미해지고 영화의 중반부터 무의미한 폭력이 반복적으로 헛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도경의 내레이션의 시작해 그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구조로 내러티브가 구성된 것을 고려하면 영화는 도경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경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한계는 주인공 개인의 것이지만 카메라는 그의 현실 속에 관객을 연루시킨다. 부득이 도경의 세계와 연루된 관객은 그의 현실을 승인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비루하고 야비한 캐릭터들의 대결은 호기심을 일으키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은 잔인하고 비도덕적임에도 그 결과는 오히려 도덕적이다. 잔인한 폭력의 이미지들이 오히려 도덕적이라니 무슨 괴변인가? 예컨대 앤서니 버지스의 소설 <시계태엽오렌지> (1962)에서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범죄자 알렉스가 루드비코 요법에 의해 눈뜨고 볼 수 없는 폭력의 순간들이 강제로 뇌에 각인되어 범죄에 역겨움을 느낄 때 도달하는 도덕적 효과라고나 할까?

  이토록 잔인(?)하게 도덕적인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간단히 말해 모두 죽일 놈이다. 관객들이 고민의 여지가 없도록 서로에게 총질을 하고 공평하게 죽음을 맞는다. 세상에 이처럼 평등한 죽음이라니. 영화 <아수라>에는 망설임의 순간이 없다. 당연하다. 모두가 애초에 악당이니까. 아무리 주인공 도경이 아내를 위해서 무수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변명을 한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인물은 악당이고 자신의 욕망을 토해내고 실현시키고자 한다.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관객 자신도 숨겨놓았던 욕망을 날 것 그 자체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이다. 한마디로 이런 방식이다. “말해봐, 너도 여차하면 죽이고 싶은 놈이 있잖아.”                                                                       

  그러나 영화 <아수라> 속의 인물들은 욕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욕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그들의 욕망은 모순과 간극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지만 장애에 의해 금지될 때 욕망이 솟아나고 주체가 행위하며 선택과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형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속의 인물들은 존재로서의 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요구에 따라 기능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에 가깝다. 욕망 없는 인물들의 평면성은 어디선가 보았던 캐릭터를 수집해서 모아놓았다는 인상을 준다. 가령 곽도원이 연기한 야비한 검사 역할이나 황정민이 연기한 능청스러운 악덕 시장 캐릭터는 각각 영화 <범죄와의 전쟁> (2012)과 <신세계> (2013)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아수라>는 세상의 부조리를 폭력적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지만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디선가 보았던 장면들의 묶음에 가깝다. 요즘 한국 영화들이 보여주는 부패한 도시의 비밀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매혹적이지 않고 결말 부분의 장례식장 총격씬은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리게 한다. 익숙한 플롯의 구조와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잔혹한 장면과 보는 동안 밀려드는 답답함과 허무한 죽음은 두 시간 동안 왜 우리가 세계 속에서 절망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 깔끔한 허무와 무의미.


*이 글은 고대대학원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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