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Mar 02. 2017

순간과 영원 그리고 존재

-<닥터 스트레인지> (2016)

  누구나 그렇듯 영화 속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세인의 평가에 맡겨둔다. 그는 능력 있는 외과 의사로서의 성공이야 말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손의 신경이 손상되면서 촉망받던 의사로서의 삶은 망가지고 만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스트레인지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이를 통해 손은 그의 삶을 결정하는 핵심임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손의 망가짐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고 다른 맥락에서 바라보면 그가 어떠한 규정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무(無)의 상태에 던져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설적인 사실은 스트레인지는 의사로서의 삶이 포기되는 순간에야 자신의 본래적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그의 본래적 정체성이 마법사로 제시되지만 중요한 맥락은 의사로서의 죽음이 마법사로서의 삶을 생성한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사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초중반까지 영화는 스트레인지를 통해 자기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존재자의 결의에 초점을 둔다. 반면 중후반부에는 도르마무의 추종자들과 대결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의미와 그 지반이 되는 시간의 의미에 관해 다룬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간을 순간과 영원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분할한다. 세계의 무질서와 파괴를 일으키는 도르마무의 이미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화적 시간의 관념에 현대적 외관을 덧입힌 존재이다. 영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변용한다. 크로노스는 존재를 생성하고 파괴하는 시간의 이중적인 순환성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대상이다. 영화는 크로노스의 속성을 도르마무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를 영원과 세계의 파괴자라는 이중적 존재로 제시한다.  


   

스트레인지와 도르마무의 대결은 시간 속에 개입한 ‘무한’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한다. 죽음의 반복은 무한 연쇄를 일으키며 순간 속에 영원이라는 시간성을 끌어들인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도르마무와의 대결에서 보여주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죽음이 가져오는 숭고이다. 우주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존재하고 자신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죽음의 순간 속에 내재한 영원은 반복의 형식을 통해 지속한다.

   예컨대 일상 세계를 둘러보면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완성적으로 구현하는 존재자는 길가의 흔한 꽃이 아닌가 싶다. 꽃은 자신의 존재성을 꽃봉오리를 펼쳐냄으로써 개현하고 시간과 함께 사라지며 다시 회귀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잠재된 존재성을 구현한다. 바로 순간의 사라짐과 영원이 교차하는 시간성을 꽃은 자신의 존재로 구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 세계 내에 존재하는 개체적 삶은 죽음과 함께 사라질지 모르지만 끝없이 생명 그 자체는 이어져 반복됨으로써 영원의 시간에 존재를 새겨 넣는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인간의 삶이란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일까?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명료하고 보편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삶이란 죽음을 전제한 시간성의 체험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만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하고 그것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을 것인지 결의할 수 있다. 과거에 매몰되거나 혹은 현재에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삶의 태도를 지향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본래적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존재론적 의미의 지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운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