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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Apr 05. 2017

영화 < 더 킹>은 정치적인가?

-한재림 감독 <더 킹> (2016)

    한재림 감독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몫이다. 그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던 혹은 반대하던지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더 킹>을 정치영화라고 말한다. 사실 나는 정치영화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영화 <더 킹>이 정치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 내용이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인지. 하지만 이런 발언들은 장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 코끼리를 뱀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영화 <더 킹>이 선전선동을 위한 정치영화라는 평가가 자유로운 개인의 취향이기에 존중해달라고 한다면, 다만 그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는 나의 자유로운 취향도 존중해달라고 밖에. 

  영화 <더 킹>은 박태수라는 인물의 변화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전라도 출신의 검사 박태수(조인성 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한강식(정우성 분)을 도우며 승승장구해가는 과정을 통해 한국의 역사가 겪어왔던 부침을 보여준다. 정권의 요구에 맞춰 혹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기획 수사를 벌이는 사법 권력의 모습을 통해 이 땅에 정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얼마나 사익을 위해 봉사해왔는지 보여준다. 과잉된 설정으로 보이지만 조직 폭력배를 앞세워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남몰래 살해하는 모습은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박태수의 내레이션처럼 그들이 검사인지 폭력배인지 구분이 되지 않게 한다. 


  박태수가 한강식의 라인을 잡기 위해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 검사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직무유기 장면은 공적 영역의 축소와 엘리트들의 권력 놀음으로 전락한 사법 권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박태수의 선택은 자본주의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그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는 스스로 검사로서의 존재 근거를 배반했고 결국 가족과 친구 그리고 명예 잃음으로써 파멸한다. 이처럼 영화는 한국현대사에 지속되어 왔던 폭력의 구조와 공공성이 상실된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역사 속에 놓인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 관해 말한다.  

  영화 중반 펜트하우스에서 한강식이 태수에게 청산되지 못한 과거로써‘친일파’가 득세한 한국사를 운운하는 것에서부터 이 작품이 ‘정치’가 아니라 ‘역사’ 속에 놓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까지 친절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때로 영화 속에서 역사는 스스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한강식과 박태수의 기획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정권교체기에 맞춰서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TV에 등장하고 한강식과 박태수가 자신들의 명운을 거는 장면은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과연 역사라는 것은 무엇일까? 헤겔의 말처럼 역사는 스스로 자유를 향해 운동하고 진보해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키르케고르의 주장처럼 세계 안에 존재하는 개개인의 선택들이 복잡한 관계를 만들며 생성한 결과일까. 역사의 법칙 속에 개인이 실존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실존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의 두 가지 이미지를 마주하게 된다. 스스로 진보하는 역사의 이미지와 개개인의 존재적 선택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의 이미지 말이다. 어느 쪽이던 적어도 한 가지는 명확한 것 같다. 바로 정치만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영화 <더 킹>이 정치적이라면 그것은 정치를 다루거나 정치적 목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만이 우리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가능성이라는 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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