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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y 31. 2017

죽음의 원인과 실수 사이에서

-변성한 감독의 <불한당> (2017)-

  변성현 감독의 <불한당>은 일종의 관습적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남자들의 우정과 복수로 이어지는 내러티브의 구조는 기존의 조폭느와르 작품들과 다른 개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을 관습과 패턴의 산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다. 애초에 작품은 스토리 라인의 구조보다는 어떠한 상황에 던져진 인물들의 선택과 심리적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데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작품의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라는 부제는 지금의 현실이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 상태와 유사한 짐승들의 세계라는 의미 혹은 인간의 도덕관념이 불필요해진 세상의 ‘잔혹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극중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라는 한재호의 대사는 작품의 주제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오로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란 상황 밖에 없다는 말인데, 얼마나 사람은 객관적이고 상황에 따라 맞는 판단과 행동할 수 있을까?

  한재호의 말을 현실에서 실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감정과 심리에 대한 완벽한 통제와 상황에 맞는 합당한 판단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있으며 그것을 과연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작 차갑게 사람보다 상황을 믿으라고 말한 한재호가 현수에게 가족애를 느끼며 흔들리는 모습은 그의 조언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말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호는 죽어가면서 현수에게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즉, 재호는 자신의 죽음이 사람을 믿는 실수로부터 발생되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죽음 이후 홀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며 살아왔다. 그러한 이력은 그를 거대 범죄 조직의 이인자로 만들었으나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을 지니게 했다.

  그런 인물이 자신에게 중요한 내적 존재로 다가오는 타자(현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더욱이 현수는 죽음을 동반하거나 혹은 예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려운 존재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호는 자신을 배신한 현수를 제거하지 못한다. 이것은 현수가 재호의 세계 내에서 정의할 수 없는 잉여나 결여를 드러내는 기호임을 의미한다.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온 재호에게 현수는 적도 동지도 아닌 해석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자리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인의 작은 행동이 무수한 해석의 기호로 느껴지듯이 재호에게 현수라는 존재는 해석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기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거나 혹은 믿음이라거나 그 어떤 것으로 지칭한다고 해도 그에게 현수가 미지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재호가 현수에게 죽음을 당할 때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현수에 의해 일어난 자기 세계 내부의 균열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실수’라는 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영화에서 재호의 죽음은 ‘실수’가 아니라 자기 ‘원인’에 의한 것이다. 현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하를 시켜 그의 어머니를 살해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뒤이어 전개될 모든 다양한 사건들의 잠재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 가능성은 재호의 죽음 또한 포함한다. 재호가 현수라는 타자와의 우연적 만남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의 세계에는 필연적으로 균열이 발생하고, 다시 그것이 원인이 되어 현수를 제거하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재호는 현수에게 복수를 당한다. 즉 재호의 죽음은 현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원인이 된다.

  이 같은 재호의 죽음에 대해 여러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재호의 죽음이 자기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작품이 인간 존재의 지리멸렬한 삶의 무의미함과 잔혹성을 상기시켜준다고 말할 수 있으며, 혹은 더 이상 사람 사이의 믿음이 불가능한 현대 사회의 냉소주의에 대한 고발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리멸렬한 삶과 죽음은 우리 몫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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