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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n 23. 2017

'악녀'에 나타난 환멸의 기호들

-정병길 감독 <악녀> (2017)

  액션 영화란 인물들의 움직임이 주는 동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분명 한국 액션 영화의 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일인칭 FPS 게임을 하는 느낌을 주며 현장감을 극대화한 오프닝 시퀀스과 오토바이 액션 씬의 움직임은 예술이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속도감을 덧붙인 디테일한 액션 장면의 조형성은 영화 <악녀>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거리 전체를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인물들이 움직임의 합을 절묘하게 맞춰가며 만들어내는 동적인 이미지들에서 힘이 느껴진다. 특히 연변 킬러조직의 보스인 중구를 암살하기 위해 숙희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표적을 향해 완벽한 각도로 총을 겨누는 장면은 숙희를 중심으로 화면 전체의 공간을 완벽히 분할하여 활용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앞의 액션 시퀀스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만큼 호기심을 끌었던 점은 ‘악녀’라는 타이틀과 숙희라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감정들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숙희가 왜 악녀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를 칼로 찌르고 베어내는 숙희의 모습은 악녀라기보다 처연한 느낌을 주었다. 숙희는 연인의 복수를 위해 칼을 들었고 자기 손으로 연인의 목숨을 취하는 상황에 처한다. 또한 그녀의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이 주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숙희의 생존 의지는 정당한 것임에도 이 작품은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하도록 이끌어간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악녀는 삶에 대한 환멸의 기호들로 가득하다.   

  숙희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킬러가 되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원하던 복수도 했다. 문제가 해결되었고 조직의 보스인 중상과 결혼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중상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배후임을 모르던 숙희는 조직에서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국정원의 비밀조직의 특급킬러로 다시 탄생한 그녀의 인생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누군가를 죽이고 베어내는 일이 전부다. 그녀에게 현수라는 안식처가 필요했던 것은 표면적으로 중상과 자신 사이의 아이 때문이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숙희’라는 이름에서 ‘연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무엇도 그녀의 정체성을 부여해주지 못한다. 과거 ‘숙희’의 삶이 거짓이라면, ‘연수’의 삶은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현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마저도 조작되는 삶이다. 숙희가 악녀인 이유는 그녀의 부도덕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데에 있다. 자기 삶을 일구어내지 못하는 무능이 문제이다. 그녀는 생존해 있지만 자기 존재를 구축하지 못한다.

  숙희가 영화에서 타인에게 묻는 질문은 한결 같다. 현수와 죽은 딸의 복수를 위해서 중상을 만나고도, 그에게 자신을 사랑했느냐고 묻는 질문은 어느 로맨스 영화에 나올 법한 대사처럼 식상하다. 하지만 그 대사는 그녀가 자기 삶의 근거를 여전히 타인에게 찾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숙희의 질문은 방향이 잘못되었다. 질문은 자기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를 향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명백한가! 숙희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숙희가 살인할 때마다 감춰져 있던 그녀의 과거 기억이 드러난다. 기억이란 일종의 진실인데, 인서트된 장면들을 통해 숙희의 과거가 관객들에게 설명되고, 숙희라는 캐릭터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간다. 숙희와 관계되어 있지만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던 기억들은 그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개입한다. 예컨대 국정원에 지시를 받아 야쿠자 보스를 살해한 숙희가 그녀의 손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소녀를 발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기억들은 무엇을 숙희에게 말해주는 것일까? 죄책감, 연민, 복수심 같은 것들인가? 하지만 어떠한 것도 명확하지 않다. 그녀가 보았던 것은 모두 일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우연적인 연상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갑작스럽게 그녀의 현재에 개입한 과거의 기억들은 자기 존재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숙희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그녀의 과거 기억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그때마다 현재 삶의 불온함 혹은 이질성이 환기된다. 즉 그녀로 하여금 현재 삶이 과연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 중상이 살아 돌아옴으로써 그녀의 현재적 삶은 위기에 처한다. 중상에 의해 그녀의 모든 삶이 국정원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숙희는 자기 삶의 근거를 잃고 만다. 그렇다면 숙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중상은 숙희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적 삶의 토대를 잃어버린 숙희에게 미래의 가능성이란 있는가. 그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근거인 자신의 딸이 죽었기 때문이다.

  중상이란 인물은 숙희가 지나온 과거 시간의 인격적 형상화이다. 숙희가 중상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그가 바로 그녀의 분열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현재 삶을 무너뜨리는 중상의 출현은 인간이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뜻하지 않은 과거의 파편이 현재 삶의 내부에 개입함으로써 숙희 삶에 알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온다. 혼란은 현수와 자기 딸의 죽음으로 불길하게 나타난다. 숙희는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의 늪에 빠져버린다.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잃었고 결국 자기 손으로 전 남편까지 살해한다.

  영화 <악녀>는 한 인물이 삶의 의지를 불태울수록 행복의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가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숙희라는 인물의 삶에는 허무와 자기 환멸 밖에 남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는 숙희를 통해 삶의 의지가 지닌 이율배반적 성격을 탐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의지란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하는 근거이지만, 동시에 인생을 세계가 주는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미지와 불확실성 그리고 우연성으로 가득한 세계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무수한 알 수 없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다만 영화에서 숙희의 의지는 세계의 환멸로 전이된다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영화 <악녀>는 지극히 삶을 허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손쉬운 희망은 경멸을 불러오지만 삶의 허무는 생명을 경시하게 만든다. 삶의 진정한 문제는 허무에의 잠김과 환멸이 아니라 생명의 지속과 방향에 있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 미래의 잠재성을 상상하는 것 혹은 창조의 역량을 생산하는 것이야 말로 현재적 삶을 긍정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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