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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Nov 24. 2017

기억의 의미

-원신연 감독의 <살인자의 기억법> (2017)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이 소설은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사라져가는 세계에 대한 은유로 가득합니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이지요. 우리가 어제의 나하고 내일의 나라는 것이 같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억의 작용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점차 사라진다면 어떤 일들이 발생할까요? 아마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떠한 근거나 확신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속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는 우리는 세계의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존재의 사라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이란 세계 내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두 다리로 뿌리를 두고 있는 세계 속에서 펼쳐지고 죽음과 함께 접혀진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세계는 많은 과학적 사실과 주장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그 실재는 불투명합니다. 언제든 패러다임은 바뀌고 정설이라 믿었던 믿음은 사라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태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 내에서 삶을 지속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키워나갑니다. 즉 인간 존재는 세계와 분리된 정신적인 실재이거나 혹은 물질적 자동기계가 아닙니다. 세계 내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지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함으로써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소설 속의 살인마처럼 기억이 상실되어간다면 ‘나’라는 존재는 세계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살인마는 자신이 구하고자 했던 딸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거의 모든 기억을 상실한 살인마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상실된 세계의 형상으로써 무(無)입니다. 어떠한 의미도 사라진 순수한 세계이지요. 이러한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의 실재를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 상실의 과정을 통해 세계를 형식하고 인식하게 하는 지성 능력이 무화되는 과정을 냉철한 관찰과 함께 보여줍니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요. 소설 속에서 살인마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인이나 현실을 초연한 도학자의 풍모에 가깝습니다. 그 살인마는 작가의 의식 내부의 대리인이겠지. 이러한 설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의식에 있어서 지성의 작용이 사라질 경우 가장 활성화되는 의식 작용은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입니다. 살인마의 기억이 사라질수록 그의 상상력은 인생의 허무를 마주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지성으로부터 해방된 상상력이 나아가는 곳은 측정할 수 없는 절대적 무의 세계이지요. 살인마는 절대적이고 인간의 삶 자체가 미망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종착합니다. 그곳에서는 은희라는 존재의 실존마저 의심스럽습니다. 바로 의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가 한계입니다. 그 이후의 세계는 인식이 불가능한 물자체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칸트가 인간 의식의 한계를 이성을 통해 형식화해낸 것처럼, 이 소설은 살인마의 어조로 의식의 한계 끝까지 가보고자 시도한 작품은 아닐까요. 

  이 작품의 진행 과정을 생각해보면, 영상보다는 언어라는 매체가 주는 매력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언어의 매력은 관념을 감각이고 물질적으로 전달해준다는 것입니다. 특히 문학에시 시적 언어는 사물과 세계의 본질의 관념을 감각적으로 전달하고 존재하도록 하는 데에 그 힘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시는 침묵하는 사물의 존재를 환하게 드러낸다고 합니다. 이처럼 언어는 영상이 지니고 있지 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또한 살인의 은유와 죽음의 이미지를 감각적인 언어로 활용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적대적인 살인마를 등장시킴으로써 내러티브의 긴장을 끌고 갑니다. 하나의 작품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이나 주제 의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호기심과 흥미를 유지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해내고 있어요. 여하튼 덕분에 소설을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살인마가 다른 살인마에게서 딸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독자의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한 맥거핀(macguffin)입니다. 이것은 소설적 긴장을 유지하기 위한 요소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진짜 주인공은 살인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의식의 운동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소설적 형식입니다. 소설의 형식을 통해 비의적인 은유들이 의식의 운동 과정을 구체화하며 운동의 굴곡점마다 살인마의 내면이 진술됩니다. 바로 의식의 흐름이  활자화된 물질적 언어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소설의 맥락을 고려했을 때 원작을 각색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냈을지 궁금했습니다. 소설을 단순히 영화로 재구성해 놓았다면  원작만큼의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어요. 소설과 영화는 매체가 가진 전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원작을 영화로 각색한다면 분명 영화만의 언어적 개성을 관객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작 소설이 짧고 간결하면서도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감각들이 살인마의 진술과 겹쳐져 흘러가는 것이 중요하다면, 영화의 경우는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마가 자신의 잠재된 기억을 다시 찾아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합니다. 결과적으로 두 작품은 같은 소재를 다루지만 기억의 벡터는 반대입니다. 소설은 지성의 능력이 사라지는 절대적인 무의 순간을, 영화는 의식의 차원 아래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을 파고들어요.


  이제 영화에 대해 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병수가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자각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거를 현재 속에 끌어오는 것, 그리고 진실을 다시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우리의 의식은 현재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과거부터 축적된 기억과 경험의 결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가끔 가만히 있어서 잊고 있던 과거가 불쑥 떠오르지 않나요?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독립 기억들이지요. 그 순간 우리는 지금 현재와 관련되어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어떤 기억과 경험들이 그 시절의 감각들과 함께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감각과 기억들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현재의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나의 현재와 과거가 동시적 마주하여 접히는 경계의 순간이고, 고정되어 있던 질서들이 새로운 시간적 경험과 함께 다시 경험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니체가 말한 정오의 시간이 아닐까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병수는 자신의 의식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기억하려는 인물입니다. 녹음기에 자신의 기억을 녹음하거나, 컴퓨터에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일기를 쓰는 행위들이 증거이지요. 하지만 그 노력들은 의식이 붕괴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평소 운영하던 동물병원에서 자신의 실수로 치료 중이던 고양이가 죽게 되면서 자신의 습관적 기억조차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독립 기억과는 달리 습관 기억들이 어긋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우리가 일상을 스트레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신체에 각인된 습관 기억 때문이지요. 평소 잠이 덜 깬 상태로도 걸어서 학교를 가고 집으로 능숙하게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습관 기억들 때문입니다. 만약 습관 기억이 없이 모든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면 인간은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에 미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습관 기억의 문제는 인간을 일정한 상황에 고정시키고 반복하는 기계로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방식으로 신체를 변용시키느냐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병수는 자신의 습관 기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자신이 동물병원을 계속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의식이 지워지면 살인에 대한 습관 기억만 남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의 확신과 달리 습관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치료하던 고양이가 과도한 진통제 사용으로 죽게 되는데, 이로 인해 자신의 습관마저 믿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병수가 의식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병수가 인식하는 대상들은 어디까지나 병수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입니다. 카메라를 통해 펼쳐지는 병수의 세계가 과연 사실인지는 관객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기억하고 의식하는 세계는 이미 어떠한 객관성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병수가 우연한 교통사고로 알게 된 살인마 태주로부터 딸 은희를 지켜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이 영화의 큰 틀입니다. 태주가 병수의 집에 침입하거나 은희를 납치하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면서 갈등과 긴장이 유발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요소는 관객의 호기심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럼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다른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선 병수는 죄책감이 없는 살인마일까요? 폐허가 된 성당에서 수녀로 살아있던 죽은 누나가 병수를 위해 기도하고 부친살해의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병수의 의식 아래 잠들어 있는 죄의식을 누나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노출한다고 보입니다. 또한 병수가 살아있다고 믿어온 누나가 자신의 부친 살해로 인해 오래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하나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병수가 의식하는 현실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지요. 그가 치매로 붕괴되고 잃어버렸다고 믿고 있는 현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짜 반전은 병수가 치매를 앓고 난 이전과 이후에도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만들어놓은 환상 속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병수는 연쇄살인마이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은 하나의 희생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살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살인을 ‘청소’라는 방식으로 개념화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어이없을 정도로 나약합니다. 죽은 누나의 환영을 만들고 그를 통해 자기 내면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아이러니한 것은 병수가 자신의 친딸이라고 믿고 태주에게서 지키고자 했던 은희도 알고 보면 자신의 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병수는 삶의 존재 의미 전부를 부정당합니다.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생이란 우리의 무의식적 의지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화에서 눈여겨보고 싶은 장면은 병수가 자신의 기억을 바로잡고 태주가 은희를 납치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 이후 병수는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그 기억들은 병수의 현재의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되지요. 은희의 아버지로 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은희의 진짜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병수는 태주로부터 은희를 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무의식적 환상을 가로지르고 은희는 그의 실재 딸이 되는 것이지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다시 등장하는 태주는 병수의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주는 죽었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고 병수의 삶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지요. 환상에서 계속해서 깨어나라고 말입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태주가 병수의 잊고 있던 기억들을 찾도록 해주지요. 태주는 병수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일종의 의지입니다. 태주는 병수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진실을 돌아보도록 인도하지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 소설과 다른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그것이 성공했는지는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몫이겠지요. 하지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이라는 소재로 소설과는 다른 낯선 분위기를 만들려는 했던 시도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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