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Jul 11. 2018

존재라는 폭력

-박훈정 감독의 <마녀> (2018)

  지금까지 박훈정 감독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을 차갑게 응시해왔다. 기존의 작품들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우정, 의리, 용서와 같은 인간적 가치들이 파괴되어버리는 과정을 그렸다. 그리고 전작 영화 <V.I.P>는 오프닝 씬이 여성의 육체를 전시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 의도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고자 했던 작품이다.

  기존의 작품들이 인물의 내적 갈등과 생존 욕망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화 <V.I.P>는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미국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내재된 기형적인 폭력의 구조를 보여주려고 했다. 미소년의 얼굴을 한 범죄자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처벌되지 못하고 피해자가 희생된 상태로 방치되며 국가의 법이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매끄러워 보이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공적인 법적 절차가 아닌 한 개인의 복수로 마무리된다는 점은 법을 집행하는 국가 체제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시퀀스는 드디어 처벌이 불가능하게 보였던 범죄자를 처벌했다는 안도와 마지막 순간까지 살의를 가진 개인의 복수 밖에 처벌의 방법이 없었다는 법의 부재가 겹쳐진다.  

  이후 박훈정 감독은 영화 <V.I.P>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스스로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며 반성했고 이것을 증명하듯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마녀>를 내놓았다. 하지만 남성 대신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고 해서 균형 잡힌 젠더 감수성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가 작품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작품이 사회의 일반적 통념과 일치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범주를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이해하고 완성도 있게 보여주느냐의 여부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마녀>의 핵심은 존재와 의지의 관계에 맞춰야 할 것 같다.

  영화 <마녀>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가 굉장히 뚜렷하다. 전반부는 평범한 소녀의 모습으로 자신의 진짜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윤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망각했던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폭력과 살인을 행하는 마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고 밝힌 만큼 시리즈의 1부는 아무래도 극을 이끌어갈 세계관을 구성하고 주인공을 그 세계의 중심으로 배치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전반부는 그래서 자윤의 기시감이 지속되고 가족들 사이의 사랑이 강조되면서 평화로운 일상의 세계를 위협하는 무리들이 등장으로 긴장을 유도한다.

  작품은 의도적으로 가족애가 전반부에 강조되는데 자주 보았던 헐리웃 가족 영화의 문법을 따른다. 가족이라는 것처럼 대중적으로 거부감 없이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요소도 없다. 행동의 당위로 쉽게 설정되며 나와 적 사이의 갈등이 뚜렷해지는 효과도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철저히 작품이 배경이 되는 세계관을 관객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한다.

  내러티브의 진행 과정으로 보건데 영화 속에서 비밀리에 프로젝트가 추진된 한국 지사에서 자윤은 자신의 치료제를 찾기 위해 미국 본사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부터 스케일이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기대된다.   

  영화의 반전이라면 자윤이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던 수용소에서 탈출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자신을 보육할 부모를 선택했으며 관객들에게 전반부에 보여준 그녀의 삶 전체가 계획된 것이라는 점이다. 자윤은 뇌 실험의 여파로 죽어가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오디션 방송에 출현해 염력을 선보이며 적을 유인했고 가족과 친구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 그녀는 철자하게 자기 보존의 의지를 보여주며 평범한 자윤의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사람을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작품의 타이틀처럼 ‘마녀’이다.

  자윤의 행위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의 문제이다. 과연 자윤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의 평범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고 동정에 호소하며 때로는 부당함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부정의 크기와 정도를 차치하고 우리의 일상적 평범함이란 익숙한 모습의 악(惡)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이 있다. 커다란 도리는 눈에 보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인데 거대한 불합리에도 이 말은 해당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으로 숨어버리기 마련이다.  

  염세주의적 철학가라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이란 맹목적 의지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현실이란 인간의 주관으로 만들어진 표상의 세계이며, 실제 우리의 표상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맹목적인 삶을 향한 의지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의견에 대한 충분한 반론이야 가능하지만 일상의 경험적 삶에 대한 차갑지만 날카로운 분석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더럽고 추잡한 세계 그리고 타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물질세계 속에서도 우리가 기어코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족과 친구 그리고 명예와 자아성취 등 삶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내부에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충동의 체계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삶의 현실은 무수한 의지를 지닌 존재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는 폭력을 동반한다. 존재하는 생명체는 다른 생명을 취하지 않고 자기 개체를 보전하고 지속할 수 없다. 사슴이 풀을 뜯는 것처럼 혹은 풀이 흙의 미생물을 흡수하며 꽃을 피우듯 존재자는 자신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존재자의 생명을 취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苦)이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타자를 향한 폭력을 동반한다.

  영화는 자윤의 내면에 내재한 삶을 향한 의지를 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삶의 의지를 지닌 존재란 누군가를 파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삶이란 영원히 불안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자윤은 스스로 마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즉 그녀는 ‘인간’이 되기 위해 ‘괴물’의 길을 택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괴물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자기 의지와 운명의 주인으로서 인간적 존재가 된다. 이 같은 아이러니와 역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기 존재에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이야 말로 삶을 수용하는 근본적 자세이며 인간으로 존재하는 길다. 삶을 향한 의지를 잃은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 혹은 인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스스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고 결정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인간의 얼굴을 한 괴물들의 세계 내에서 괴물의 얼굴을 한 인간이 되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바라보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고민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믿음이란 환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