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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Sep 16. 2018

속도와 n의 목소리

-스티븐 쉬블 감독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 (2018)

  우리의 주변에는 무한의 소리들이 존재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숨을 쉬는 일이고, 말하는 일이며, 소리를 듣는 일이다. 허공을 떠도는 무한의 소리들은 우리의 신체를 침입해 삶이란 단일한 목소리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n개의 소리는 단수의 언어적 의미와 파롤로 환원되지 않는 침묵을 포괄한다. 단일한 주체의 목소리로도 환원되지 않는 침묵의 영역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잠재한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는 한 음악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분화된 소리들의 얽힘을 다룬다. 더 정확히는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대상을 둘러싼 소리들의 무수한 연결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미리 말하면 죽은 사물의 목소리, 사회의 목소리 나아가서 류이치 사카모토 자기 내면의 목소리까지 카메라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한 음악가의 위대한 생애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소리들이 인간이란 존재를 휘감는 방식의 문제이다.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한 폐교를 방문해 물에 잠겼던 고장 난 피아노를 가지고 연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수몰되었던 재해지역의 폐교에 남아있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류이치 사카모토는 “마치 죽은 송장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피아노라는 사물이 감춰온 존재의 깊이가 “죽은 송장의 소리”라는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재해가 일어나 수장되었던 피아노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 피아노는 폐교되기 전에는 누군가의 음악이고 추억이며 어떤 관계들을 간직한 사물이다. 아마도 하나의 사물(피아노)은 자신의 존재를 분명 학교라는 장소에 새기며 자리했을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피아노에게서 “죽은 송장의 소리”를 들었다며 말하는 ‘죽음의 선언’은 더 이상 피아노가 자신의 존재를 개시하지 못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바로 영화는 사물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시작하고 있다. 영화가 사물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예술가의 일상을 통해 존재함의 양상에 관한 물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더 엄밀히 말해 우리는 한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을 구분해야 한다. 죽음이 존재자의 존재 속성이라면, 인생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을 향유하는 과정이기에 죽어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죽어감의 과정 속에 있는 예술가의 삶에서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유를 작동시킨다.

  이 작품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5년간 인후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과 음악을 대하는 방식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한 인간의 깊은 회한의 심정 혹은 죽어감에 대한 슬픔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슬픔의 정조 대신 영화 전체에 담담히 흐르는 것은 삶을 놓지 않는 끈기와 음악을 매개로 완성하고자 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주변을 맴돌고 있는 창밖의 그늘진 풍경들의 색조는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그러한 공간 내부에서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지속한다.  

  우리는 일상의 무수한 소리들 속에 휘감겨 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예컨대 숲 속에서 울고 있는 벌레 한 마리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 전체를 걸지 않던가. 그 소리의 어울림이 숲이라는 세계를 만든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갇힌 우리는 그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욕망에 갇혀 자신의 목소리만을 듣는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소리들은 그저 소음으로 시끄러운 세인들의 잡담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천부적인 감각과 영감을 지닌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라고 떠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주의 깊은 청자라는 점을 환기한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부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일상적 세계 내에 균열을 일으키며 류이치 사카모토의 내재된 세계의 전체를 울리는 어떤 외부의 목소리 말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는 수많은 소리들이 얽히는 숲이라는 공간에 혼자 앉아 사유하고 듣는다. 그 소리들은 어떤 선형적인 배열에 따른 논리적인 언어로 교직된 소리가 아니다. 어떠한 체계화 과정으로부터도 벗어난 날 것의 소리 그저 자신의 전 존재를 담아 내지르는 순수한 존재의 함성이다. 이러한 청각 이미지를 통해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일상적 감각을 벗어나 자신만의 바흐를 창조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인후암 판정을 받은 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다. 치료를 받고 있지만 언제 암이 재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남겨진 시간 내에 자신이 구상하는 음악을 완성시키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시작한 작업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 (1972)에 등장한 ‘바흐의 코랄 전주곡 F단조’의 느낌을 담은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바흐 음악의 정수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정과 신의 숭고에 관한 찬양이라는 점에서 죽음을 곁에 두고 작업을 이어가는 그의 심정이 짐작된다.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현재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그의 현재 작업은 과거를 통해 고유한 의미를 획득한다. 영화는 1980년대 도쿄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발전과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문명을 다룬다. 이때 음악에는 큰 변화가 생기는데 바로 ‘속도’의 문제이다. 인간의 신체는 같은 멜로디를 아무리 빨리 연주해도 속도에 있어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반면 기계음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무한 속도로 연주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차이가 소리에 이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진단으로 읽힌다. 현대 사회는 광속으로 변화하는 속도의 찬양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 결과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망각해가는 우리의 현실이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왜 류이치 사카모토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에 천착해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지 알게 된다. 그가 보기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음악은 각각의 소리들이 그 고유성을 보존하면서도 하나의 낯선 소리 공간을 만들어 낸다.

  기계음들의 무한 속도가 원래 음들의 고유성을 지워버린다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소리들의 무정형한 운동들 사이의 간격을 보존하고자 한다. 즉 류이치 사코모토가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지만 그의 작업이 지닌 의미는 속도의 기계적 조작을 넘어서 그것으로 환원 불가능한 소리의 간격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리의 공간을 두고 벌어지는 어려운 투쟁이다. 속도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물질문명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의 고유한 본래성을 회복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속도의 변화 그리고 문명의 발전에 대해 손쉽게 긍정과 부정의 감정을 내세울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현대 사회의 발전된 문명을 전근대 사회로 되돌릴 수 없으며. 동시에 현대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오류에도 등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음악가로서 세계 내에 존재하는 고유한 소리들의 간격을 놓치지 않으려 하며, 원전 반대 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구체화한다.

  영화는 많은 것들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 전체의 일관성을 구성하는 것은 류이치 사카모토를 중심으로 그 자신의 목소리를 포함해 주변의 사회적 목소리와 예술 작품 내부의 소리들 그리고 숲으로 은유되는 일상의 무수한 존재들의 함성을 평등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라는 신체는 무수한 소리들을 담는 그릇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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