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0
작년 2월쯤 친한 언니가 카페를 연다며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더 바쁘고 안절부절못한다는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를 마치고 2학년이 된 딸과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 가는 5살 아들을 보며, 올해는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기가 막힌 시기에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관련된 일거리를 물고 온 언니가 봄 제비 마냥 어찌나 고맙던지. 난 당연히 고민할 것도 없이 돕겠노라고 했다.
5월 중 카페 오픈을 예정으로, 실내 장식품이며 각종 집기 등을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언니네 아버지 소유의 상가건물은 번화가나 인구 밀집지역은 아니었지만, 국립 단과대학의 정문 바로 옆이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케팅한다면 어느 정도 승산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건물주님의 따님이시니 임대료가 나가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점이었다. 초보 자영업자와 직원이 부푼 꿈에 빠져들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알고 보니 그전 세입자가 기본 골자를 다져놓고는 영업을 하지 않은 채 세를 빼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언니가 사장이 된 것이었다. 소소한 인테리어만 손을 보면 될 정도로 매장 상태가 괜찮았다. 넓은 매장을 채울 테이블을 우드슬램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하고서 한 달 동안 사포질과 스테인 칠 작업만 했다. 내가 카페에 출근하는 건지, 카페 인테리어 공사장에 출근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시간이 지나고 4월이 되어서야 커피머신을 만질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쿠션이나 액자, 각종 소품, 잔과 그릇 등을 발품 팔아 찾아보고 주문하고 알맞은 자리들을 찾아주면서 한 번씩 에스프레소를 내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일이라고 급하게 잡힌 오픈일이 4월 30일이 되면서 언니와 나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두어 달 동안 우리가 한 거라고는 막노동뿐인데, 이제 막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사장과 원두커피는 좋아하지만 남이 내려준 커피만 사다가 먹어본 직원은 음료 제조법을 책으로만 배우고 있었다. 그때 남편의 친구인 커피 사장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린 커피를 팔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을 것이다. 물론, 팔리지도 않았을 테지만.
맛있는 원두를 고르고 제대로 된 레시피까지 배우고 나서 내 손으로 처음 만든 라떼를 먹었을 때, 나는 감히 생각했다. 별다방보다 맛있다,라고. 그건 희열이자 성취감이었고 설렘이기도 했다.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었다. 집에서 아이들을 위한 밥과 반찬을 만들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였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오픈 후, 손님이 오길 바라면서도 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손님이 오면 차렷자세로 서 있는 사장 옆에서 덩달아 긴장한 직원은 어색하지만 한껏 어색한 미소를 지어댔다. 아직 모든 게 손에 익지 않아 실수도 잦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다. 손님이 깨끗이 비운 잔을 씻으면서 기분 좋아졌고, 많이 남은 음료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맛있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제법 단골도 생기고, 대학 시험 기간에는 자리가 없어서 되돌아가는 손님도 있었다. 그때 사장과 직원은 기념이라며 손님으로 꽉 찬 매장을 사진으로 찍어서 남기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물론, 힘들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챙겨 등교 준비를 하고 학교와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 바로 출근이었다. 3시에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면 또 다른 업무가 시작됐다. 아이들을 씻기고, 늦은 빨래를 하고, 저녁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피곤한 하루를 맥주 한 캔으로 달래고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출근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커피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카페에서 나는 곧잘 웃곤 했다.
아침마다 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부동산 할아버지와 안부를 묻는 것을 시작으로, 인사성이 밝은 남학생에게 뿌듯한 마음으로 커피를 내려주며 내 아들이 저렇게 바르게 컸으면 좋겠다는 사심을 담았던 것도, 새로운 메뉴를 서비스라고 전해주면 신이 나서 꺄르르 웃던 여대생들도, 근처의 주민센터 직원이 맛있다며 동료들을 다 데리고 와서 정신없이 단체 음료를 만들어주던 때까지. 나는 사람을 어려워하고 가끔은 불편해하기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커피 때문에 시작한 일을 결국, 사람들 때문에 계속할 수가 있었다.
마치 처음 일을 시작했던 스무 살 초반의 나처럼. 아직 이런 마음들이 내 속에 남아있었는지 가끔, 어느새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친한 언니와 동생 사이이고, 자리를 잡는 중이라 제대로 월급은 받지 못했지만, 그것도 중요하다는 남편과 달리 나는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 같은 아줌마가 그 정도라도 버는 게 어딨느냐 하면서. 스물두 살, 그 언젠가 선망하던 회사의 대표에게 나는 원석이다, 갈고닦아 보석처럼 빛나겠다, 돈은 받지 않고 일하겠다는 등 패기 넘치는 메일을 보냈던 내가 아직, 신기하게도 여기에 조금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대학가라 방학 기간에는 손님이 줄었고, 길 건너편에 젊고 예쁜 아가씨가 새로 카페를 오픈해서, 아줌마 사장과 직원은 왠지 의기소침해지고 더욱 조바심이 생겨 새로운 메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좋은 재료를 듬뿍 넣어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만, 맛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인드를 가진 사장과 불씨 열정을 깨우던 직원은 그렇게 온 마음을 카페에 쏟고 있었다. 그리고 긴 겨울방학 끝 무렵, 코로나19가 터지고 말았다.
사장님은 손님이 없는 가게라도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홀로 고군분투하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아이들과 집에 갇혀있어야 했다. 정신없이 카페에서 일한 지 1년 하고도 반이 지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2년째 되던 해 카페는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시절 폐업했던 가게가 이곳 하나뿐이겠냐마는, 다시 열정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했던 우리로서는 여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커다란 창밖으로 바라보던 계절의 변화나, 그라인더 속 원두 갈리는 소리, 막 내린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 단골손님들이 건네던 인사와 반가운 얼굴들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 어렵게 되살린 내 안의 불씨가 꺼져버릴까 겁이 났다. 문 닫힌 어두운 카페 안에 미처 처분하지 못한 커피 머신과 솜사탕 기계처럼 뭔가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버려져 먼지만 쌓일까 봐. 다시 저 기계들이 돌아가 뜨거운 커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서른여덟, 나는 다시 뭔가를 뜨겁게 시작해 볼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허탈한 것도 잠시,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웃고, 자라났다.
코로나19가 앗아간 것들이 참 많았다. 빼앗긴 것도. 그래도 그 속에서도 살아내고 견디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얻게 되고 남는 것 또한 있겠지.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콩고물 떨어지듯, 딸아이의 온라인 개학이 가져다준 새 노트북도 남았고, 오전 두어 시간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도 생겼고, 뭔가를 시작할 의지도 약간은, 아주 약간은 남아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