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나는 감정노동자입니다

2020. 11. 19

by folie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오더니, 불혹을 앞둔 나이에 감정노동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 내 손을 벗어나 학교와 유치원으로 향할 때, 한동안 방향성 잃은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거칠어지고 잔주름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뒤덮인 손등 끝에, 투박한 손가락들이 나뭇가지처럼 뻗어있었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타지에서 경력이 10년이나 단절된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게다가 애가 둘이나 생겼고, 혼자서 끈질기게 일에 매달릴 환경도 시간도 체력도 열정도 부족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면 자신을 향해 열린 기회의 문틈들이 보인다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나에게 열린 건지, 닫히려는 건지, 덜 닫힌 건지 모를 작은 문틈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부터 밀어 넣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과 고립된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가다, 다행히 상황이 차츰 나아지면서 아이들도 다시 학교며 유치원이며 제 갈 길을 찾아갈 때쯤이었다. 고객상담실이라고 전해 듣고 찾아간 곳은 어느 가전제품 회사의 콜센터였다.


오전시간에만 근무를 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고, 또 장점이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십 대 중반쯤 두 번째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매일 업무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줄타기하듯 토로하던 시기였다. 미혼의 아가씨들만 있던 사무실에 아들이 하나 있다는 삼십 대 초반의 여직원이 새로 들어왔었다. 환영회 겸 야유회 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런 아줌마를 뽑아줘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려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땐 뭐 이런 걸로 울기까지 하나 싶었는데, 아니다. 마흔에 취직을 해보니 역시 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였다.


오랜 시간 자그맣게 쪼그라들어있던 내가 아주 조금 펴지는 느낌이었다. 그 언니는 그 느낌이 무척 반갑고 기뻐서 울었으리라.


면접을 본 다음날부터 일주일 간의 업무교육이 시작됐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흐름에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유영하며 흘러가다 보니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형식을 갖춰 업무를 처리하는 방법이나 기본적인 업무지식들을 배우느라 온 신경과 집중을 기울였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지난 십 년 동안, 생각보다 몸이 앞서는 생활을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내 생각이나 판단보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살아가기 급급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내게 전화를 건 고객들은 언제나 집요하게 내 생각과 판단을 요구했다.


간단한 제품정보를 알려주거나 출장접수를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도움을 줄 수 없을 때는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상담원의 역할은 한정적이었고, 본사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정해진 규정과 매뉴얼을 전달하는 하나의 채널에 불과했다. 업무에 투입되자마자 만난 민원 고객은 한 시간이 가까운 통화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수고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풀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기력함에 좌절했다.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이 하나같이 해 준 말이 있었다. 절대, 단정하거나 확답은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의 말도 이해가 되고, 고객의 주장도 이해가 되니 나는 아직 상담원과 잠재적인 고객의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것 같았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돼서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고, 접수도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고객은 대부분 중년과 노년의 고객들이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뭐랄까, 문제의 해결과 함께 자신들의 불편함을 알아주길 원하는 하소연 고객들이 많은 건 그래서일까.


인자하고 차분한 말투로 전화를 걸어온 한 할머니 고객이 있었다. 서울 사는 아들이 사서 보내준 제품이 잘 되지 않는다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전 상담이력을 조회해 봤다. 이미 기사가 여러 번 출장해서 제품을 몇 번 확인도 해봤지만 제품에는 이상이 없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른바 강성민원인이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말을 계속 듣고 있는데,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향했다. 그때는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둔 때였는데, 코로나19가 다시금 확산되고 있을 시기였다. 그래서 외지에 사는 자식들이 모두 추석에 고향집 방문을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추석에도 혼자 있게 생겼는데, 아들이 비싸게 사준 이 제품을 써먹지도 못하고 그러니 제품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푸념 섞인 하소연을 듣고 있다가, 이유가 어찌 됐든 제품이 마음에 안 든다니 출장접수라도 진행해야 했다. 다른 방법도 없고, 상황을 마무리할 노하우도 없으니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고 접수를 하는 것뿐이었다. 긴 통화 끝에 할머니가 말했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순간, 통화가 끝났다는 안도와 함께 상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구나. 나는 상담원이었구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먼저 귀 기울이고 들어주는 상담相談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날은 알 수 없는 먹먹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감정노동자 : 대인서비스를 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행하는 노동.


하지만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담원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어떻게든 자신의 감정이 스며들 수가 있다. 더군다나 2개월 차 신입 상담원은 더더욱 감정이 이입되어 고객과 통화할 수밖에 없다(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분명 회사의 입장에선 한 고객을 삼십 분 넘게 상대하는 내가 효율성 떨어지는 직원일 수밖에 없을 테고, 고객의 입장에선 긴 시간을 투자했으나 명쾌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내가 무능력한 직원일 수밖에 없을 테다. 뼈아프지만 현실이었고, 직장생활이었다. 힘든 고객을 만난 뒤엔 악몽을 꾸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평온한 얼굴 뒤에 모난 말을 쏟아내던 고객의 보이지 않던 얼굴이 겹쳐지기도 했다. 과연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되뇌기도 한다. 그럼에도 버텨보자고 했던 건,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너희를 낳기 전엔 이런저런 일들을 했었어,라고 해도 안 믿는 눈치였는데 출근하는 나를 보면서 왜인지 자기들이 더 설레고 기뻐하는 걸 보면서 마냥 쉽게 나자빠지고 싶지가 않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 나에게만 의미 있는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그런데도 힘든 건 힘든 거고, 상처가 깊고 날카로운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여전히 퇴근 후에는 하루 종일 말을 쉬지 않았던 입과 성대보다, 가슴 언저리가 더욱 뻐근하고 아리다.


(놀랍게도 3년째 버텨내고 있다. 비록 그중 1년은 육아휴직을 얻었고, 더불어 원형탈모도 얻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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